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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정' 김지운, 과거로 현재를 말하다(인터뷰)


"실패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하는 영화"

[권혜림기자] 경계선을 보기 좋게 흐트리며 장르를 변주해내는 힘은 감독 김지운이 지닌 빼어난 능력이다. 스릴러부터 코미디, 느와르, 호러, 서부 액션물까지, 김지운의 시야는 드넓었다. 배꼽 잡도록 코믹한 스릴러('조용한 가족')나 서글픈 호러('장화, 홍련'), 어딘지 바보같으면서도 사랑스러운 멜로('사랑의 가위바위보' '사랑의 힘'), 멋지지만은 않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서부극('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라스트 스탠드') 등 김지운이라는 감독의 손길 안에서 숱한 장르물들이 그 전형성을 신나게 벗어났다.

새 영화 '밀정'(감독 김지운, 제작 영화사 그림㈜)의 개봉에 앞서 김지운의 마법을 기대한 것도 당연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수많은 작품들이 시대의 어둠과 민족의 아픔을 소재로 단지 애국주의적인 메시지를 그렸던 것을 떠올리면 더욱 그랬다. 영상을 통해 숱하게 박제돼 온 이 시대를 김지운이라는 개성파 감독은 어떤 시선으로 마주할 것인지, 상업적 드라마와 감독 자신의 스타일 사이에서 그는 어떤 결단을, 혹은 타협을 할 것인지가 못내 궁금했다.

'밀정'은 1920년대 말, 일제의 주요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상해에서 경성으로 폭탄을 들여오려는 의열단과 이를 쫓는 일본 경찰 사이의 숨막히는 암투와 회유, 교란 작전을 담은 작품이다. 의열단의 핵심 멤버 김우진(공유 분)과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이정출(송강호 분)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밀정'은 김지운 감독의 필모그라피 중 가장 상업적인 색채의 영화다. 여기엔 감독이 애초 목표로 했던 '콜드 느와르'라는 지향점과 소재가 지닌 비극성 사이의 타협이 분명 존재했다. "차갑게 시작했다 뜨겁게 끝났다"며 제작기를 돌이킨 김 감독의 말이 이를 설명한다.

김지운 감독은 조이뉴스24와 인터뷰를 통해 "스파이 영화의 기조를 가지고 이 작품이 소재로 한 그 시대 선열들의 모습을 진중하게 다루면서, 내가 레퍼런스로 삼고 있는 스파이 걸작들의 기품 있는 스릴러까지, 둘 다 가져갈 수 있다는 생각이 제작 동기가 됐다"고 알렸다.

영화 속 이정출 캐릭터의 모델이었던 황옥이라는 인물의 삶은 김 감독으로 하여금 당대의 모순을 한꺼번에 느끼게 만든 대상이었다. 일본 경찰과 의열단원이라는 두 정체성 사이를 배회했던 실존 인물 황옥에 대한 진실은 현 시대까지도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그가 진짜 의열단에게 일본 경찰의 정보를 넘겼는지, 아니면 그저 의열단을 대상으로 첩보 활동을 한 일본 경찰의 밀정일 뿐이었는지 우리는 아무도 그 진실을 알지 못한다. 현실은 때로 영화보다도 영화적이다. 그런 황옥의 삶 앞에서, '밀정'을 차갑게 완성하려 했던 감독의 계획은 처음부터 무모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황옥을 가리켜 "그 시대 모순을 가장 집약한 인물 같았다"고 말한 김지운 감독은 "만일 그런 상황에 살지 않았다면, 황옥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답했다. 이어 "모든 국민이 분열을 겪는 시대였고, 국가가 비정상적 상태가 되면 개인의 삶에 위협이 된다는 것을 그 시대를 통해 다시, 오늘,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고 알렸다.

"'국가의 주권이, 힘이 없으면 이렇게 휘둘리게 되는구나. 그런 상황에서 국가가 아니라 개인이 시달리고 위협받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황옥이라는 인물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어요. 그를 통해 그 시대를 다시 이야기할 수 있고, 이 시대도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요. 의열단의 작전은 실패했어요. 그래도 그걸 딛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요. 실패가 쌓여 전진하는 것, 그것이 결국 성공이 된다는 이야기가 이 영화의 실낱같은 희망의 메시지예요. 만일 '밀정'에 감동이 있다면, 그 지점이어야 하는 것 같아요. 실패의 역사를 실패로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딛고 더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지점이요."

이하 김지운 감독과 일문일답

*이하 내용에는 영화의 결말과 주요 장면들에 대한 이야기가 포함돼 있습니다.

-'밀정'은 워너브러더스코리아의 첫 번째 한국영화 투자배급작이다. 여기서 오는 부담감은 없었나?

"워너의 첫 영화라는 사실이 부담스럽진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100억 원 대 제작 규모의 영화이고, 시대를 다룬 영화였고, 주제화하는 내용의 무게감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것을 가져가면서 어떻게 하면 흥행의 보답을 받을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 정말 '정당한 보답'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밀정'이 활극처럼 오락적으로 가지 못하는 지점이 있지 않나. 그 시대 인물들의 비극적 장렬한 모습을 담으면서 소위 말하는 '국뽕' 같은 느낌으로 치우치거나 감정이 과잉되지 않게 주의했다. 여러 감독들이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만드는데 '꼭 내가 아니어도 될 영화'를 만드는 의의는 없기 때문이다. 적절하게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하려 했다."

-'밀정'에 뛰어들게 된 과정과 캐스팅 과정이 궁금하다.

"'인랑'을 하기 전 소품을 한 편 준비하려 했었는데, 미국의 인디영화나 중저예산 영화는 캐스팅이 굉장히 중요하다. 소위 '이름 없는' 영화들은 (잘 알려진) 배우가 있어야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준비 중이던 미국 영화의) 캐스팅 리스트에 올린 배우들은 거의 일류급이라 스케줄을 잡기 힘들었다. 지지부진 흘러가고 있었는데, 그러던 차에 (워너브러더스코리아의) 최재원 대표가 가져온 것이 '밀정'이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과 '장화, 홍련'을 같이 했었다. 시나리오를 읽는데, 묵직하고 진중하더라.

그런데 상업 요소가 너무 미흡했다. 이런 묵직함을 잃지 않고 영화적 재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오프닝의 배신자 척결 신, 기차 시퀀스를 넣었다. 그러면서 두 가지를 다 가져갈 수 있는 꼴이 됐다. '이 정도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이미 세 편을 함께 했던 송강호와 다시 만났는데.

"배우들이 시대의 공기를 표현하면서 영화적인, 장르적인 느낌도 가져가는 것이 어떻게 하면 가능할지 고민했다. 당시 단장 김원봉도 약관 25세였다고 하는데, 과연 (역사 속 실존 인물들과 실제로 비슷한) 이 나이대의 배우들이 그런 연기를 잘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됐다.

그러다, 이정출 역 정도는 완숙한 관록의 배우가 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인물 자체가 항일과 친일을 오가는 캐릭터였다. 시대의 세파를 다 표현할 줄 아는 배우가 있어야 했다. 그런 차에 최재원 대표가 '송강호가 이 시나리오를 마음에 들어한다'더라. '진짜? 정말?' 했다. 그리고 최재원 대표는 송강호에게 가서 '김지운 감독이 이 시나리오를 하고 싶어한다'고 했다. 결국 밀정은 최재원 대표였다.(웃음) 송강호가 있어 제작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대작 치고는 제작이 빨리 진행됐다. 작년 2~3월 시나리오를 받고 1년 전 배우들을 만나기 시작했는데 영화가 지금 나온 것이다."

-감독에겐 관객들의 충성도 높은 지지를 이끌어냈던 컬트적 감수성이 있지 않나. '반칙왕'이나 '조용한 가족'으로 대표되는 혼성장르의 코미디를 두고 가장 김지운답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블록버스터 '밀정'에선 본인의 색깔, 스타일을 외부 조건과 자주 타협해야 했을 것 같은데.

"나와 '장화, 홍련'을 같이 했던 이병우 음악 감독을 보며 느낀 것이 있었다. 연주를 하기 전에 튜닝을 하지 않나. 연주 하나를 하기 전에 튜닝을 하고 나서,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치고 있더라. '수천 번 했을텐데 그걸로 시작하나?' 하다가 '아, 그래야 하는건가' 했다.

'밀정'의 톤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었던 것을 계속 배열하고 쪼여갔다. 그걸 매일 해야 했다. 그러면서 균형을 맞추는 수밖에 없다. 그런 작업이 필요한 특별 구간이 있는게 아니라, 그냥 어제 했던 것을 계속 또 하는 것이다. 깎고 조이는 과정을 매일 하면서 밸런스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편집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시는 이것을 빼지 않거나 넣지 않자'고 약속을 해야 했을 정도로 수없이 했다. 넘치면 깎고 모자라면 끌어올리고, 그 다음에 배우에게 감정적인 것을 더 요구하거나 후반에서 음악으로 끌어올리거나 하는 작업을 이어갔다.

시나리오에 쓰인 것 말고, 미쟝센을 통해 혈관을 만들고 피를 돌게 하는 것들은 후반작업에서 나오는 편이다. 혈색을 만드는 작업인 셈인데 그런 과정을 통해 톤을 더 강화했다. 현장에서 모자랐던 것을 편집과 후반 작업의 터치로 강화한다. 내 방식은 소리, 편집, 색보정 등으로 완성되는 경우가 많다. 영화의 문학성, 플롯과 대사에 나온 것 말고 뭔가가 더 필요한 예술의 영역이 있지 않나. 혹시 개연성이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 있을지라도 끊임없이, 줄기차게 연기자의 영역으로 보여준다는 생각을 했다."

-이정출의 감정 변화에 공감하기 어렵다는 반응도 있다.

"이정출이 변하는 과정에서 개연성이 덜 느껴진다고도 하는데, 나는 끊임없이 포석을 깔았다. 이정출은 한 때 고려혁명당 김장옥(박희순 분)과 동지였고 항일 운동도 했지만 세파를 맞은 인물이다. 그래서 마음의 빚이 있다. 초반부터 친구이자 동지였던 김장옥의 죽음을 눈앞에서 봐야 한다. 그러다 새로운 주제를 명령받게 된다. 죽은 친구의 인명부를 들여다보는 장면도 있었고, 의열단으로 침투하기 위해 김우진을 만나 서로 쇼잉(Showing)을 하고 회유하는 중에 술집에서 김장옥을 매개로 정서적 유대감을 쌓기도 한다. 심지어 이정출은 김장옥을 통해, 정채산(이병헌 분)이 신뢰할만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포석은) 사실 너무 많다. 인물이 말을 안 했을 뿐이다. 나는 인물이 직접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에 극도로 거부감을 느끼는 스타일이다. 그것을 다른 예술의 영역, 특히 연기와 색감, 공간의 분위기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 보여줬다고 생각했다.

이정출은 끝없이 번민하고, (송강호는) 그 불안한 시선을 연기로 처리한다. 그 개연성에 가장 집착한 지점이 기차 시퀀스다. 굉장히 상징성 있는 장면인데, 기차는 총독부를 폭파하려 경성으로 가는 도구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역사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전진하고 있는 역사. 그리고 김우진과 이정출이 있다. 김우진은 머뭇대지 않고 직선운동을 한다. 전술적으로 빠지거나 이동을 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정출은 계속 혼란을 겪는다. 이쪽 저쪽에서 머뭇거린다. 역사의 도도한 물결이 기차로 상징된다. 이 사람들을 밀어붙이는 것이 기차인 셈이다. 두 인물의 상태로 그것을 표현했다.

자신을 압박하고 밀어붙이는 시대의 압박에서, 이정출은 거꾸로 역류해 김우진을 향해 간다. 음악과 함께 고속으로 표현한 장면이다. 아마 이런 포석을 잘 타고 간 관객들에겐 (이정출의 감정이) 아무 문제 없이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장편의 수와 엇비슷한 양의 단편을 내놨었다. 당분간 단편 작업은 하지 않을 생각인가.

"나는 소위 워커홀릭이다. 항상 영화를 찍고 있는 시간이 제일 좋다. 영화를 찍는 것 그 외의 것은 다른 사람이 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다. 나보다 더 이 영화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혹은 나의 반쪽 영혼이 대신 해주면 좋겠다.(웃음) 술꾼이 술을 먹었을 때, 도박꾼이 도박을 하며 가장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처럼, 나도 영화를 할 때 그렇다. 우리가 평소 겪지 않는 희로애락은 물론 노심초사하는 감정까지 있는 곳이 영화 현장이니까. 가장 인간적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다 포함돼있는 작업이다. 나는 그 때 비로소 사람이 돼 있다. 어떤 무언가를 찾으려 하루 12시간 이상 몰입할 수 있는게 그 일밖에 없다.

단편 영화는 보통의 저예산 (장편) 상업 영화를 만드는 것과 똑같은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단편 두 개를 하면서 1년 넘는 시간을 까먹은 적도 있기 때문에 당분간은 잘 모르겠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사진 이영훈기자 rok6658@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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