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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배의 와일드카드] 누구를 위한 게임등급제인가


 

플레이어킬링(PK)을 허용하지 않는 '로엔그린' 버전과 PK를 허용하는 '데포로쥬' 버전 두 가지로 나뉘어 지난 7일 다시 심판대에 오른 리니지에 대해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심의물 불량'이란 판정을 내린 후 온라인게임 업계의 분위기가 침통하게 가라앉았다.

'심의물 불량' 판정은 심의 신청이 접수된 게임이 등급심의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충분한 자료나 요건을 갖추지 못했을 때 내리는 것이다.

영등위 측은 "엔씨소프트가 리니지를 두 개 버전으로 나눠 심의를 신청했으나 동일한 ID로 두 개 게임에 아무런 제한없이 접속할 수 있어 독립된 게임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려 심의물 불량 판정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판정 이유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 같은 영등위의 태도에 대해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는 게 일반적인 업계 반응이다.

영등위의 명백한 오판

영등위가 공개한 판정 이유를 따져 보면 '심의물 불량'은 명백한 오판임을 알 수 있다.

영등위 측은 보도자료를 통해 "동일한 연령의 유저가 한 개의 계정으로 두 개의 버전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점에서 두 개의 버전을 독립된 게임으로 보기 어렵다"며 "각각의 등급분류를 실시할 수 없어 해당 게임에 대한 '심의물 불량' 판정을 내렸다"고 공개했다.

이런 지적에 대해 엔씨소프트 측은 "현재 등급 분류를 받지 않은 '리니지'는 하나의 아이디로 모두 접속할 수 있지만, 사전 심의의 결과에 따라 연령을 기준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게임을 제한하는 기술을 개발해 놓은 상태"라고 설명했다.

사실 영등위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자면 게임 심사를 요청하는 업체들은 심의를 신청하기 전에 자아 검열을 통해 영등위가 매길 등급을 점친 후 해당 등급 미만의 유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 놓아야 한다.

이같은 결과를 야기하는 영등위의 주장은 어설프기 짝이 없을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하기까지 하다.

앞에 있었던 사례를 보자. '15세 이상 이용가'로 판정받은 액토즈소프트의 '미르의 전설2'도 심의 전엔 모든 연령의 유저가 접근할 수 있었다. 액토즈소프트로서는 영등위의 심의 후에 판정받은 등급을 바탕으로 15세 미만의 청소년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면 된다. 이것이 사전 등급이 온라인게임에 적용되는 올바른 순서다.

마찬가지로 엔씨소프트도 '로엔그린'과 '데포로쥬'를 기술적으로 분리해 놓은 후 등급 분류를 신청하면, 영등위가 내리는 등급 결과에 따라 연령을 기준으로 접근을 제한시키는 것이 올바른 적용 순서다.

예를 들어, 영등위로부터 '로엔그린'이 '12세 이상 이용가'로, '데포로쥬'가 '15세 이상 이용가'로 등급을 받는다고 가정해 보자. 등급이 결정된 후 엔씨소프트는 15세 이상의 유저라면 '로엔그린'과 '데포로쥬'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12세부터 14세까지의 유저라면 '로엔그린'만을 이용할 수 있도록 제한하면 된다.

이번 일로 영등위는 이런 기본적인 원칙조차 스스로 깨버리는 어리석음을 노출시켰다.

청소년을 위한다구?

문화관광부와 영등위가 사전 심의를 주장하면서 강력하게 펼친 논리가 '청소년 보호'였다. 하지만, 앞으로 '청소년 보호'란 말을 가능하면 꺼내지 말 것을 당부한다. 오히려 '행정 편의'를 논리로 내세우는 것이 가슴에 다가 온다.

리니지는 이미 수 백만 명에게 서비스되면서 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온라인게임이다. 개발실에서 실험 중인 베타 온라인게임이 아니다. 이번 사건처럼 영등위가 스스로 세운 원칙을 깨면서 업계가 납득하는 등급제를 정립하지 못한다면, 게임등급제가 온라인게임 산업에 적용되는 시한만 미루게 될 뿐이다. 물론, 유보 기간 동안 청소년들은 문화부와 영등위의 주장대로 위험천만한 인기있는 온라인게임에 그대로 방치된다.

인과 관계를 더 연구해야 하지만 문화부와 영등위의 주장대로 리니지가 청소년의 탈선을 부추기는게 사실이라고 치자. 영등위가 제시한 PK에 대한 기준을 받아들여 엔씨소프트가 재심사를 신청한 두 개의 버전에 대해 영등위가 '심의물 불량' 판정이란 편법으로 등급 매기기를 유보한 후에도 수 많은 어린 청소년들이 리니지를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지금도 어디선가 어린 청소년들 사이에서 리니지 때문에 폭력이 일어나고, 아이템이 거래되고, 성매매가 일어나고 있을 수 있는 일 아닌가.

문화부와 영등위가 진정으로 청소년을 보호하려는 의지를 가졌다면 '심의물 불량' 판결을 내리기 전에 엔씨소프트에 전화를 걸어 불량 사유에 대해 충분히 논의를 했어야 했다.

리니지의 심의를 책임지는 황형준씨는 '심의물 불량' 판정 이유에 대해 "게임 내용 중에 게임 제목을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이는 수험생이 이름을 기입하지 않은 시험지를 제출한 꼴"이라고 말했다.

그의 비유가 적절하다면, 시험을 감독하는 선생님의 입장에서 학생이 시험지에 이름을 쓰지 않았다고 0점 처리하는 것보다 미리 꾸짖어 주는 것이 바른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심의물 불량'이란 적절치 못한 판정으로 엔씨소프트의 주가를 곤두박질 시켜 주주들에게 금적적인 피해를 입히고, 사전 심의도 모자라 온라인게임 업계에 자아 검열을 통한 자아 등급을 강요하고, 전화 한통을 걸기 귀찮아 엉뚱한 판정으로 등급 매기기를 유보해 어린 청소년들을 그대로 방치해 두는 문화부와 영등위야 말로 정말 불량스럽다는 비난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이번 오판 사건으로 인해 등급 판정 기준도 모호하고, '청소년 보호'란 대의 명분조차 지키지 못하는 게임등급제가 도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처음으로 의문을 갖게 됐다.

앞으로 우리는 문화부와 영등위가 '행정 편의'를 이유로 '청소년 보호'에 소홀히 하면서 '온라인게임 등급제'를 왜곡시키는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것이다.

/박형배 칼럼니스트 elecbass@shinbi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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