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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호의 IT와 사람] 사이버 대중화시대의 아버지의 고민


 

얼마 전 고향친구를 만났다. 이제 중년에 접어드는 학부형답게 자연스럽게 자녀 얘기가 화제로 등장했다. 이같은 대화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요즘, 아이들 키우기가 참 어렵다"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청소년들 심정은 어떨까. 필자의 과거를 회상해봐도 별로 다를 바 없다. "요즘, 어른들은 우리를 너무 몰라" 그랬던 것 같다.

요즘 어른들에 대한 청소년들의 심정을 물어봐도 마찬가지일듯 싶다. 그렇다. 아이는 어른을 모르고, 어른은 아이를 모른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 말에는 뭔가 모순이 있다. 아이가 어른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어른이 아이를 모른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다. 사람은 누구나 일정한 성장과정을 거쳐 성인의 세계로 진입한다. 그렇기에 아이들의 세계를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현대의 기성세대가 청소년기 시절을 잊고 사는 기억상실증 환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러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해볼 수 있다. 어슴푸레 자신의 청소년시절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모르는 것이 아니다. 어른은 청소년기의 느낌을, 아니 자신의 과거를 잊어버린 것이다.

정말로 자신의 과거를 죄다 잊어버렸을까. 아니다. 그것도 정답은 아니다. 잊고 싶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그 의미를 한번 더 짚어보자. 좋은 일만 기억하고, 기분 나빴던 순간들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을 가장 잊고 싶은가. 나의 경험을 되새겨 볼 때, '나'라는 존재가 외면받거나 억울한 일을 경험했을 때의 심정이 가장 참담했던 것으로 회상된다. "네까짓 것이 뭘 안다고?" "알지도 못하는 것이 깝죽거리기는?"

영화 친구에서도 그런 대사가 나온다. '우리는 쪽팔리는 거는(것은) 못 참는다 아이가' 그 상실감 때문에 결국 그는 친구를 죽이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보인다. 이런 순간들을 담담하게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말은 담담하다도 해도 억울함과 원망은 그대로 묻어나오기 마련이다.

이러한 진단이 현대의 기억상실증 환자의 처방전이 될 수 있을까. 필자의 중고등학교 시절, 그리고 대학시절을 회상해도 그렇다. 아름다운 추억은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즐겁고 흥겹던 순간은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진다.

반면, 아프고 서럽던 순간의 기억이 강하게 되살아난다. 아버지의 죽음. 친구의 죽음. 그리고 억울하고 분하던 순간의 상황들. 중고등학교 시절이다. 조례시간, 대오를 맞추고 있었다. 먼 산을 바라보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지만 씨-익 미소를 지었다. 순간 마주친 선생님과의 눈길. 그리고 불려나가 귀싸대기 된통 얻은 맞은 일.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잘못한 것은 웃은 죄 밖에 없다. 그런 억울한 순간을 겪지 않은 사람을 별로 만나보지 못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며칠 전 고향 친구를 만난 그날, 고등학교 시절 아주 친하게 지냈던 L은 말했다. "요즘 집에 가면 아이가 너무 컴퓨터를 오래해서 큰 일이야. 근데. 우리 집 뿐이 아니야. 다들 그래. 대한민국의 문제야."

L의 아이는 초등학교 4학년에 재학중이라고 했다. 아직은 어리니까, 통제가 쉽다고 한다. 아이의 컴퓨터 사용이 늘어나면 전원 콘센트를 통째로 치워버린다고 한다. 콘센트를 찾다가 없으면 숙제를 하거나 책을 본다는 것이다.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의 자녀교육방법이 적절하다고 동의를 구하는 것 같다. 그러나 L은 회사동료의 자제 K군의 상황이 조금 심각하다고 말을 늘어놓는다. 필자가 보기에 L의 상황도 심각한데, 얘기는 한 집을 건너 뛰었다. K군은 중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몇년째 인터넷에 빠져 사람들과 대화조차 어려운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L의 얘기에 기초, 재구성한 K군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건축업에 종사하는 아버지와 중학교 교사인 어머니. 아버지는 최근 한국 건축업계의 사정을 감안할 때, 고전을 겪는 상황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매월 일정한 수입이 있다. 경제형편이 넉넉한지는 알 수 없어도 빈곤상태는 아니라고 한다.

K군은 어린 시절부터 학교에 다녀오면 언제나 혼자였다. 맞벌이 부부로서 아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부모 입장에서 K군은 안쓰러운 존재였다. 그러던 어느 날. K군이 컴퓨터를 사달라고 졸랐다.

평소 그를 측은하게 바라보던 부모는 아들의 요구에 두 말없이 컴퓨터를 샀다. 부모 입장에서도 컴퓨터 구입은 바람직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늘 직장에서 컴퓨터 학습의 필요성을 느껴왔는데 이번 기회에 컴퓨터를 배워보자는 마음이 일었다.

아들의 요구대로 최고급 스펙의 컴퓨터를 구입했다. 다들 아는 얘기. 게임을 하려면 최고의 스펙을 갖춰야 하지 않는가. 이때부터 K군의 생활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집에만 오면 컴퓨터를 끼고 살았다. 컴맹인 부모는 거금을 들인 컴퓨터가 제값을 하는 것 같아, 아들을 대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몇 년이 지나면서 아들의 컴퓨터 사용시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늘어났다.

과거처럼 전화를 사용한다면 늘어나는 전화요금으로 아들의 컴퓨터 사용 용도와 행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초고속통신망(ADSL) 가입 이후, 월정액으로 바뀌어 아들이 컴퓨터로 무엇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가족들과 아예 대화를 하려고 들지 않는다. 제발 자신의 생활에 간섭을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게임에 몰입하는 K군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었다. K군 입장에서는 부모의 고언이 잔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자신에 대해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던 부모가 어느날 자신의 공간에 끼어드는 것이 K군은 싫었던 것이다. 엄밀히 말해 부모가 자신과 놀아주지 않았기에 컴퓨터와 가까워졌다.

그런 존재인 컴퓨터를 이제 떼어놓으려는 부모가 한없이 미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학교 교사인 어머니는 인터넷 등 사이버 중독상태에 있는 청소년들을 대하면서 K군의 문제를 우려스럽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급기야, 인터넷 사용시간을 통제하거나 인터넷 서비스를 중단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 곳곳에 떨어져 있던 잔돈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조금 지나자, 아버지 어머니의 지갑에 들어있던 돈이 조금씩 사라지곤 했다. 모두 K군의 소행이었다. 한번 난리법석을 펼친 이후, 이같이 심각한 일은 수면 아래 잠기는듯 했다. 모든 상황이 개선되는듯 했다.

얼마 전 비만 상태인 K군은 아침마다 조깅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대견스럽게 생각하며, 격려했다. 그러던 어느날. 규칙적으로 조깅에 나서는 아이의 옷이 너무 깨끗하다는 것을 알았다. 조깅을 했다면 당연히 땀에 젖어 있어야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조깅을 하는 아들을 뒤쫓아간 K군의 아버지가 당황스러웠다. 잠시 후, K군이 도착한 곳은 동네 PC방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동안 아침마다 PC방에서 인터넷 게임을 하고 돌아왔던 것이다.

얘기는 일단락 됐다. K군의 아버지는 현재 자식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리해도 아이가 인터넷 중독 상태에서 빠져나올 것 같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방치할 수도 없는 게 부모 마음이다. 또 강압적으로 하자니, 가출이라도 할까봐 걱정이다.

이런 얘기를 듣다보면 남의 얘기가 아닌 것 같다. 필자 역시도 K군의 생활이 일정 부분 이해되는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청소년 자신들만의 노력으로 사이버 중독상태 탈출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알콜 중독, 약물 중독, 일 중독. 이중 일 중독을 다른 중독과 동일하게 나열한 것에 대해 의아 또는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독이라는 현상의 속성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이해되는듯 하다. 뭔가에 중독된 사람 곁에 있는 사람은 부담을 느낄 때가 많다. 일 중독 상태에 빠진 사람 곁에 있는 사람들도 동일한 경험을 한다. 일 중독자들은 결과를 위해 때로는 개인과 조직을 희생시키기도 하고, 불법과 편법을 자행하기도 한다.

개인의 꿈(dream)이 개인의 야망과 욕망일 경우는 여러 사람들의 희생을 수반한다. 히틀러는 자신의 꿈을 위해 엄청난 생명을 담보했다. 그러나 개인의 꿈(vision)이 모든 사람과 함께 나누고자 할 때는 간디와 테레사 수녀 같은 모습으로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개인이나 기업에게 사명선언문(Vision Statement) 제정을 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중독 상태를 벗어나는 길은 혼자서 하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주지의 사실이듯, 알콜 중독자 치유방법의 첫 출발은 온 가족의 협조를 기본 전제로 한다. 나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 중독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이버 공간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바라잡아야 한다. 사이버 공간은 일상 생활공간의 보완제(補完材)재이지, 대체재(代替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같은 인식의 개선을 통한 사이버 중독 치유는 온 가족의 협조에서 출발한다. 컴퓨터 사용자들은 알고 있는 '디폴트'라는 말은 초기설정 상황을 가리킨다. 사이버 중독 치유를 위한 디폴트 시각은 다음 두 가지를 필요로 한다.

첫째, 사이버 중독 문제를 사이버 공간 체류시간이나 일일 사용횟수와 같은 단순한 현상으로 진단하려는 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사이버 중독은 사이버 공간 사용에 대한 정량(定量) 분석이 아니라, 정성(定性) 분석으로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사이버 공간 사용자가 사이버 공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지의 관점으로 평가돼야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컴퓨터를 오랫동안 사용하는 사람 모두를 사이버 중독자라고 규정한다면, 현대인들 대부분이 사이버 중독자라는 터무니 없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컴퓨터나 인터넷 사용 이후, 현실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사이버 중독이다.

둘째, 현실 생활에서 충족되지 않는 욕구가 사이버 공간에서 채워지고 있다는 시각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욕구가 차단될 때, 가상의 공간을 통해 자신의 본능을 충족시키려하는 욕구로 사이버 중독 현상을 바라볼 때, 적절한 대응방법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 환경은 가정이다. 그러나 바쁘게 살아야 하는 현대의 아버지 어머니가 가정에서 자녀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부족하다. 부모는 자신들이 바쁘게 살아야하는 부모 심정을 자식들이 크면 알게될 것이라고 생각으로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간다. 그러나 자식들은 그런 부모 마음을 깨닫기까지는 수십년이 걸린다. 그 오랜 세월동안 청소년들은 부모에 대한 오해와 몰이해로 기성세대를 원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청소년들의 사이버 중독은 청소년 문제이지만, 그들만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 것이다. 원인 제공자로서 부모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결손가정에서 살고 있는 청소년의 일탈과 사이버 중독은 우리 사회가 감당해내야할 문제이다.

문제는 이같은 사이버 중독이 이제 성인들의 문제로까지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부부간의 대화 부재, 기업내 노사 양측의 대화 부재. 정당간의 대화 부재. 이러한 각종 이해 당사자간의 대화 부재로 인해 만들어지는 사이버 중독자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다는 데 주목해야할 것이다.

사이버 중독의 원인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에게만 집중하면 대책이 나올 수 없다. 사이버 중독으로 빠져든 사람, 개인에게 관심을 쏟아야만 대안과 처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인터넷의 불건전 사이트를 차단하고 사용시간을 통제하는 등의 일차원적 처방만으로는 사이버 중독 현상의 실효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김강호 I커뮤니케이션연구원 대표 khkim@bora.daco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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