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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호의 IT와 사람] 어느 영세 자영업자의 독백


 

서울 강남 조그만 사무실에서 직원 두 세명과 함께 패키지 소프트웨어 등을 판매하고 있는 L 사장. 직원 수를 두 세 명이라고 하는 것은 회사 형편이 들쭉날쭉하기 때문이다. 회사 재정상태가 조금 양호할 때는 네 명까지 늘어난다. 그러다 경기가 조금 어려워지면 한 명의 직원과 L 사장, 두 사람이 회사를 꾸려가야 된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인 50 고비를 바라보고 있는 그는 요즘 자신의 지나온 삶에 회한이 많다. 지난 10여년간 IT분야를 중심으로 국내외를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현재 그에게 남은 것은 고향 친구가 헐값에 빌려준 서너 평 남짓한 사무실이 전부이다.

이 정도는 필자가 알고 있는 L에 대한 사전 지식이다. 어느 봄 날. L은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 대뜸 한마디 했다. "얼굴 한번 보여줘. 만난 지 너무 오래됐잖아."

오랜만에 만나, 최근의 경험담을 서로 나눴다. 주지하다시피 세상살이의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어느 한 쪽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로 티격태격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를 파고 들어가다보면 결국 '돈'문제로 귀결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L의 최근 고민도 그러한 문제였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어. 아무리 약속해도 나중에 약속을 깨뜨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야."

그는 자신의 경험 뿐 아니라, 지인들의 경험까지 동원해가며 얼마나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잃게 됐는지 증명해보이기라도 하듯 열변을 토했다.

"이 회사 설립 이후, 거래업체 중 지금까지 허위매출전표 끊어주지 않은 회사가 단 한군데도 없어."

그는 쉴 틈도 없이 얘기보따리를 풀었다.

"국내에서 굵직하고 이름만 대면 알만한 회사들도 있는데, 대부분 그래요. 하지만 그들을 나무랄 수만도 없어. 나도 그들 때문에 먹고 살고 있으니까."

그는 50만원 어치의 물건을 구입하고, 100만원 어치의 영수증을 발급한다. 그렇게 영수증을 발급하다 보면 실제 물건을 판 매출보다 매입량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 당연히 서류상 적자기업으로 전락한다. 그렇게 적자를 기록한 기업은 그동안 물건을 구입하면서 선지불한 부가가치세를 되돌려받을 수 있다. 부가세 환급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되면 서류상으로 재고는 쌓여간다. 그러다 자신이 납부해야 할 세금은 밀리게 된다. 처음에는 신용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다가 나중에 눈덩이 처럼 불어나는 이자와 상환원금를 감당하지 못해 신용카드 불량거래자로 낙인찍히는 사람이나 다를 바 없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L은 현재 바로 그 지점에 서 있었다. 올초 1/4분기에 납부해야 할 세금을 아직 납부하지 못했다. 아니, 쥐꼬리만한 매출에 풍선같은 허위 매출이 덧붙여졌는데, 무슨 수로 세금을 납부할 수 있나. 지금 당장은 아무런 대안이 없다. 오늘 당장 직원들 급여를 줄 자금이 없는 형편이다. 아니, 당장 식대 지급할 자금조차 없는 상황이다.

그런 마당에 정직과 투명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얘기이다. 이달 말에도 거래처에서는 허위매출 전표를 요청하게 될 것이다. 마음으로는 욕을 하면서도 또 다시 허위자료를 발급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L의 하소연이다.

"요즘 대기업의 순익이 상승하고, 재무구조가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해?"

그는 다소 뚱딴지같은 질문을 했다. 요즘 전문가들의 얘기를 주섬거리며 읊었다.

"과거와 같은 뒷거래가 많이 없어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다보니 투명성이 제고되고 있다고..."

내가 정확히 모르기에 말에 자신이 없었다.

그는 숨도 쉬지 않고 열변을 토해냈다.

"나는 말이지. 국내 대기업들이 하청업체들의 고혈을 빨고 있다고 생각해. 국내 기업들의 투명성이 제고되고 있다고들 하는데, 표면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 할 수가 없어. 대기업들의 건전 경영을 위해 국내 하청업체나 대기업과 관계를 맺고 있는 중소기업들이 흘린 피와 땀이 제값을 받지 못하고 있지. 물건 팔 때는 현금 받고, 결제할 때는 몇 개월씩 기다려야 하는 어음을 지급하지. 새로운 노동력 착취이자 자본 착취인 셈이지."

그는 "나 같은 '영자'(영세 자영업자)는 돈 가진 사람들의 물 샐 틈 없는 울타리에서 놀아날 수 밖에 없는 희생양"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필자가 그러한 현실을 관통하고 있는 진실의 실체를 정확하게 규명할 수는 없다. 다만 느낌은 있다. 최근 우리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그러한 현실의 이면을 짐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단적인 사례가 신용카드문제가 아닌가 한다.

최근 필자가 살고 있는 용인에서 신용카드 빚에 허덕이던 젊은이들이 살인사건 용의자로 검거됐다. 그들이 고민하던 카드 빚의 규모는 700만~800만원 수준. 1천만원에 채 미치지 못하는 규모의 빚에 허덕이던 젊은이들이 또래의 꽃다운 젊은 여성들의 생명을 잔인하게 앗아간 것이다.

신용카드회사들의 빚 독촉이 이만저만하지 않았음을 짐작케해주는 대목이다. 그런 신용카드 회사들의 지난해 영업실적을 보자. 최근 신용카드 회사들이 발표한 지난해 영업실적은 사상 최대의 영업수지 흑자를 기록, 표정관리에 들어갈 정도라고 한다. 지난 한해 동안 국내 신용카드사의 당기순이익은 무려 2조5천억원.

개별 기업들의 영업신장세는 졸린 눈을 번쩍 뜨게 할 만큼 폭발적이다. 전년 대비 올 1/4분기 동안, 신용카드회사들의 영업실적을 보자. BC카드는 75억원에서 255억원으로 무려 240% 성장했다고 한다. 그룹 전체 매출을 사상 최대 규모(38조원)로 끌어올리게 하는데 일등공신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는 삼성카드는 50% 이상에 달한다고 한다. 국민카드는 1천444억원으로 22.7% 성장. 외환카드는 564억원에서 586억원으로 3.9% 성장.

어떻든 신용카드 회사치고 적자낸 기업은 눈을 씻고도 찾아보기 어려운가 보다. 그동안 신용카드 회사들은 마구잡이로 카드를 발급하고, 무조건 대출을 단행했다. 이렇게 파이를 늘려놓은 상태에서 대출금 연체자들에 대해 무자비한 채권 회수의 칼날로 그들의 목을 죄었다.

L은 말한다. 최근 1~2년 동안 자신이 고용할 수 있었던 직원들은 그런 신용카드 빚 등으로 정상적인 금융거래와 담을 쌓은 사람들 밖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어 그는 독백처럼 말했다.

"나는 지금 이런 상황을 소설로 쓰고 있다. 우리 후손들이 21세기 초에 살았던 선배들이 얼마나 악조건에서 치열하게 살았는지를 남기고 죽고 싶다."

그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잠시도 쉬지 않고 전화 상담에 열중하던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직원에 대한 L의 얘기가 귓전을 때렸다.

"저 친구는 정말 악바리같이 열심히 해. 저 친구도 언젠가는 정상적으로 금융거래를 할 수 있는 날이 있겠지."

쓴 웃음을 지으며 내뱉는 L의 한 마디가 몇일 째 내리는 빗물에 더욱 쓸쓸하게 느껴졌다.

/김강호 I커뮤니케이션연구원 대표 khkim@bora.daco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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