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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복] 다시 생각하는 ‘들쥐론’


 

아침에 일어나면 어김없이 하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문을 열고 그 앞에 떨어져 있는 신문을 가지고 들어 오는 일입니다. 저는 2가지 종류의 신문을 봅니다. 아침을 먹으면서 신문을 보고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 신문이라는 것을 펼쳐 보면, 항상 일어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 끼워져 있던 전단지가 우수수 떨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많은 전단지가 있습니다. 신문의 분량보다 전단지가 더욱 많을 때도 있습니다.

전단지의 대부분은 동네 음식점 또는 인근 유통 업체들의 안내 광고물 입니다. 피자로부터 족발, 아구찜, 보쌈, 통닭, 심지어는 찌개 배달까지 참으로 다양한 음식점 광고가 들어옵니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배달 전문 음식점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피자나 족발의 경우 도대체 몇 개 업소가 활동 중인지 파악이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집 근처를 돌아다니다 보면 한집 건너 한집 모양으로 이런 업소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동네의 사정도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입니다.

공연한 저의 걱정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장사가 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피자는 한 판을 시키면 또 한 판을 덤으로 주고, 여기에 음료수까지 서비스로 줍니다. 족발에는 뭐가 그렇게 서비스로 붙어 나오는 것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족발을 시키면 푸짐한 ‘한 상’이 차려집니다. 이런 배달업소들이 많이 생겨나기 전에는 주메뉴만을 제공하던 것이, 이제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피 말리는 경쟁에 돌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업소들이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하나 둘씩 덤을 붙이다 보니까 배보다 배꼽이 커진 형국입니다.

지난 80년대 초 주한미군 사령관이었던 존 위컴이 우리 국민을 놓고 모욕적인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들쥐 같다”는 발언이었습니다. 한 마리가 뛰면 나머지도 덮어놓고 뒤따라가는 들쥐 습성을 우리 국민성에 대입시킨 것입니다.

90년대 초반,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역시 우리 기업들을 들쥐로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 이 잡지는 “한국 기업들은 누군가 새로운 경주를 시작하면 다른 기업들이 잇따라 뛰어드는 들쥐 성향을 보이고 있다”면서 “대기업들은 자기만이 제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나도’라는 행동양식에 빠지곤 한다”고 비꼬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한 경제단체 회장이 이런 ‘들쥐론’을 다시 제기해서 논란을 빚었습니다. 그 단체 회장은 “한국 기업들은 들쥐 떼 근성을 갖고 있다”면서 “좋다고 하면 충분한 검토도 없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시장을 어지럽히는 관행을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위컴 사령관이나 영국 잡지, 경제인단체 회장이 빗댄 것은 독특한 행동 양식을 지닌 북극산 들쥐의 일종인 ‘레밍(Lemming)’이라고 하네요. 이 동물은 우두머리 집단(선두그룹)이 이동을 하면 일사불란하게 따라 다닌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선두그룹이 강에 빠져 죽기라도 하면 따라 들어가 함께 몰살을 당한다지요. 서양의 고전 동화 ‘피리부는 사나이’에 나오는 들쥐도 레밍의 일종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나도 주의(me­tooism)’는 아무리 보아도 좀 심각한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어떤 사업을 해서 재미를 보았다고 하면 앞 뒤 재지 않고 일단 달려들고 봅니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안정적인 사업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무엇인가가 한번 붐을 일으키면 도처에 수많은 경쟁자가 생겨나 사생결단으로 덤벼듭니다. 새로 뛰어드는 사업자들은 기존의 업자를 죽여야만 자신이 살 수 있다는 모진 결심으로 달려듭니다. 기존의 사업자는 새로운 경쟁자를 탈락시키기 위해 때로는 약간의 손해를 감수해가며 수완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최근 찜닭이라는 음식이 조금 유행을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시들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동네 어귀마다 찜닭집이 생기고난 이후의 풍경입니다. 물론 명성을 떨친 몇몇 업소의 경우 아직도 손님들이 줄을 서고 있다지만, 뒤늦게 업소를 연 사람들은 돈만 쓸어 넣고 건지지 못하고 있으니 ‘막차’를 탄 셈이지요.

어떤 학자의 강연을 들어보니 “레밍이라는 동물은 먹이가 부족하면 무리의 일부가 집단 자살함으로써 나머지를 살린다”고 합니다. 동화 ‘피리부는 사나이’에 등장하는 쥐들의 집단자살이 아마 이 부분을 묘사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학자는 “미천한 동물마저 종족 전체의 생존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경쟁을 벌이다가 함께 망하는 것을 보면 자연의 섭리라는 것이 오묘하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리 저리 몰려다니다가 마침내는 ‘같이 죽자’는 식의 경쟁을 벌이는 것은, 먹을 것이 없는 작은 땅덩어리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본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너무도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데 익숙해져 있어 나와 내 가족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걸 각오가 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어떤 이를 만나 저녁을 먹는데, 이 양반이 재미있는 주장을 펴더군요. “경제위기에 시달리는 아르헨티나를 회생시킬 묘책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황당한 소리를 합니다. 농담이었던 것입니다. 그 묘책이라는 것은, 사회의 각 분야에서 시달리고 있는 우리나라 30대 가장들을 가족과 함께 약 500만 명 가량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뼈 빠지게 일을 하고 서로간에 머리 터지는 경쟁을 벌이면서 그 나라 경제를 일으켜 세울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땅을 개간하고 농장을 운영하더라도 높은 효율성을 보일 것이 틀림없다고 합니다. 한국의 입장에서도 그런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가니, 인구집중 해소에도 큰 보탬이 된다고 합니다. 살인적인 입시와 취업 등 경쟁여건도 개선되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국제통화기금(IMF)은 아르헨티나에 구제 금융을 주지 말고 우리 국민에게 이민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옳은 일”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펴는 것이어서 웃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한경쟁 속을 질주하고 있는 우리가 잠시나마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보며 쓴 웃음을 짓는 것도 즐거운 일일 것 같습니다. 저는 무한경쟁은 우리의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누구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설혹 들쥐로 묘사될지언정 간단치 않은 우리의 삶은 그렇게 굴러갈 수 밖에 없습니다. 서글프지만 어쩔 수 없는 운명입니다.

한상복(㈜비즈하이 파트너, 전 서울경제신문 기자 closest@bizhig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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