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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여행] <42> "치매지만 일하고 싶어"…최고의 치료제는 '일'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는 A씨는 북디자이너인 B씨의 거듭되는 실수에 고개를 갸웃하게 됐다. 평소 일처리가 완벽한데다 젊은 직원들에게 왕언니 노릇을 해왔는데 최근에는 직원들과 갈등을 빚는 일이 잦아졌고 지시한 일에 대해 번번이 '잊어버렸다'는 대답만 돌아온다. 작업 파일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경우도 몇 차례나 목격이 됐다. 결국, B씨는 울면서 "최근 치매진단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김동선 조인케어 대표.
◇김동선 조인케어 대표.

회사를 위해서라면 B씨의 사직서를 받아야 하지만 친정어머니가 치매로 고생하다 돌아가신 경험을 갖고 있는 A씨는 "혼자 살고 있는 B씨가 회사를 그만두면 치매가 급격히 진행될 수 있다"며 타협점을 찾기로 했다. 1주일에 2번 출근으로 근무시간을 바꾸고 비교적 가벼운 일거리를 주면서 다른 직원들에게 B씨에 대해 협조할 것을 당부했다.

치매인에게 가장 좋은 처방은 '사회활동을 계속하는 것'이다. 치매로 인해 저하되는 기억, 인지·실행능력은 사용하지 않으면 더 빠르게 나빠지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에게 짐이 된다는 자격지심보다 아직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자부심이 치매에 좋은 효과를 준다.

인지증인구 700만 명을 앞두고 있는 일본에서는 최근 인지증인 사람들이 계속 일을 하고 사회활동을 하는 것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늘어나는 인지증사람들을 돌봄의 대상자로 껴안는 것은 사회적으로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인구감소로 인력이 부족한 가운데 이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공생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고고학연구자인 S씨(49)는 2년 전 인지증 진단을 받았다. 도쿠시마현 매장문화재센터에 근무한 지 20년이 되는 해였다. 그는 현재 같은 센터에서 학예사로 계속 근무하고 있다. 비결은 센터측의 세심한 평가와 업무 조절 덕분이다. S씨가 인지증으로 인해 어려워진 부분과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을 체크리스트로 작성해서 역량을 평가한 뒤, 그가 할 수 있는 업무를 찾아서 배치한 것이다.

인지증환자들이 목재를 만들거나 요리를 하는 등 '일'을 하고 있다. [사진=조인케어]
인지증환자들이 목재를 만들거나 요리를 하는 등 '일'을 하고 있다. [사진=조인케어]

또한 상태의 변화를 모니터링하기 위해 3개월 마다 한 번씩 본인, 가족, 함께 일하는 직원이 참석해서 수행 정도를 판단해서 업무를 조절하고 있다. 예전에는 발굴 등 현장업무가 주였지만 현재는 홍보물을 만들거나 전시를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후쿠오카시의 '인지증지원정책과' 카사이 코이치(笠井浩一)과장은 "보통 일이라고 하면 건강하고 젊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인지증사람들은 휴식하며 돌봄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러한 이분법이 잘 맞지 않는다. 인지증에 걸려서도 여전히 잘 하는 것이 있다"고 설명한다. 전시용 일자리가 아니라, 실제로 사회에 기여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일, 역량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지증 경험을 대중에게 알리는 강사, 같은 인지증인 사람들을 상담하는 역할은 당사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기업이 인지증 관련 상품을 기획하거나 상품 평가를 할 때 실제 사용자로써 모니터링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밖에 단시간 동안 집중력을 발휘하거나 신체활동이 주가 되는 일들이 인지증사람들에게 잘 맞다. 일하고 싶어하는 인지증사람의 경우, 이들의 능력과 희망을 듣고, 구인난에 허덕이는 기업이나 단체에 연결을 해 주는 일이 요구된다.

후쿠오카시에서는 이를 위해 '오렌지인재뱅크'를 운영하고 있다. 오렌지인재뱅크를 통해 서점에 취업을 한 K씨는 일주일에 하루, 하루 4시간씩 서점에 나가서 책정리를 하거나 책표지를 싸는 일을 하고 있다. K씨의 경우 집에서 서점까지 오가는 것이 힘들어서, 같은 동네에 사는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고 있다.

교토부 우지시의 데이서비스센터 '쿠리쿠마' 이용자들이 함께 도시락을 만들고 있다. [사진=조인케어]
교토부 우지시의 데이서비스센터 '쿠리쿠마' 이용자들이 함께 도시락을 만들고 있다. [사진=조인케어]

이 밖에도 지역에서 이들이 하고 있는 역할은 매우 다양하다. 후생노동성에서 노인보건건강증진사업의 일환으로 발간한 '일하는 인지증사람들'의 자료를 보면 무역회사에 다닌 경험을 살려서 영어통역을 하거나 재활용품을 수리하는 일, 요양시설에서 보조원으로 일하는 등 다양한 역할들을 수행하고 있다. 일이라고 하면, 반드시 유급노동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이 자료는 '고용은 한계가 있지만, 역할은 무한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일에 대한 욕구는 초로기환자뿐 아니라 개호서비스를 이용하는 80대 노인들에게도 해당된다. 교토부 우지시에 위치한 작은 그룹홈 '쿠리쿠마'를 방문하였다. 이 곳에서는 시설 이용자들을 위해 일을 알선하고 있다. 쿠리쿠마의 집 운영자인 마루야마 마유미(丸山真由美)씨는 이용자들이 시설에서 정해진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종이접기, 색칠하기, 노래접기등 반복되는 프로그램에 점차 흥미를 잃어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일들을 하도록 내버려 두고 이들이 하는 활동을 관찰하였다.

"이용자들이 산책을 나가면, 습관처럼 휴지를 주워 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아예 집게와 쓰레기봉투를 나누어 주었다." 이용자들이 손재주가 좋다는 것도 알게 됐다. 구멍이 뚫린 구두를 수선하고 부서진 책장을 주워와서 수리하기도 했다. 과거, 물건이 귀했던 시절을 살았던 노인들은 손으로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것에 능하다.

교토부 우지시의 데이서비스센터 '쿠리야마'의 마루야마씨가 치매노인들이 만든 상품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조인케어]
교토부 우지시의 데이서비스센터 '쿠리야마'의 마루야마씨가 치매노인들이 만든 상품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조인케어]

그녀는 아예 인지증 노인들을 위한 공방을 만들었다. 인근 목재상에서 버려지는 삼나무부스러기를 얻어와서 이를 보기좋게 묶어서 목욕 입욕제를 만들었다. 삼나무껍질에서 나오는 향긋한 냄새와 살균효과가 목욕입욕제로 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만들어진 상품은 지역의 사회복지기관들을 통해 판매되고 있다. 수익금으로 함께 회식을 하기도 한다. 본인들이 일을 해서 번 돈이기 때문에 회식을 할 때에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즐거워했다.

물론, 그 다음 날에는 회식을 기억해 내지 못하지만, 즐거웠던 기분은 지속된다. 지난 해에는 1년간의 수익을 계산해서 1인당 6000엔 정도의 수입을 나눠 가졌다.

"돈을 번다는 것은, 내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니까, 다들 존중받는 기분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일을 한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다는 느낌으로 이어진다. 타인에 의해 살아지는 박제된 삶이 아니라, 스스로 궁리하고 희로애락을 느끼는 생생한 삶이 일을 통해 가능해진다.

물론, 인지증사람이 톱이나 위험한 도구를 가지고 작업을 할 때 안전 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다. 마루야마씨는 "처음 인지증인 사람이 식칼을 들고 양파를 까고, 톱으로 나무를 켤 때 직원들도 조마조마하면서 이를 지켜보았다. 무조건 '할 수 있어요'라며 맡기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의 평소 모습을 보면서 어느 정도의 작업이 가능한지에 대해 정확하게 평가하고 혼자서 할 수 없는 부분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설명한다. 인지증인 사람들에게 작업을 맡길 때에는 어느 정도의 모니터링과 협력이 필요하다.

인지증환자들이 삼나무 부스러기로 만든 입욕제. [사진=조인케어]
인지증환자들이 삼나무 부스러기로 만든 입욕제. [사진=조인케어]

오무타시에 위치한 선라이즈주간센터에서도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다. 이 곳을 이용하는 인지증 노인 5명은 매주 수요일이면 자동차렌탈사무소에서 세차일을 하고 있다. 벌써 3년째인데, 이제는 수요일만 되면 '오늘은 일하는 날'이라는 것을 기억해서 각자 물통과 수건을 준비해 가지고 온다. 이 밖에도 우편물배달, 빌딩청소 등 가벼운 일거리들을 맡아서 하고 있다.

선라이즈주간센터의 매니저인 모리씨는 "몇 년 째 일이 계속 들어오는 것은 지역의 소상공인들이 협조해 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기업측에서도 인지증인력 활용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초로기인지증으로 진단받는 경우 70%가 일을 그만둔다고 한다. 일손은 없는데 인지증 환자는 늘어나기에, 인지증인 직원들을 무조건 내보내기보다 이들이 계속해서 일을 할 수 있도록 근무형태와 근무 환경을 바꾸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이런 시도가 가능할까? 장기요양기관 이용자에게 일을 시킨다면 경제적 학대 논란이 이어질 것이다. 일본에서도 비슷했지만 2017년터 법률이 개정돼 '개호보험사업장에서 사회 참가의 일환으로 작업을 하는 경우, 노동기본법이 정한 기준과 상관없이 사례금으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인정해 주고 있다. 치매인들이 무조건 보호받고 지원받기 보다는 각자의 역량과 희망에 따라 사회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기업, 법률과 제도가 바뀌어가고 있다.

◇김동선 조인케어 대표/숙명여대 실버비즈니스학과 초빙대우교수는 30대에 초고령국가 일본에서 처음 노인문제를 접한 뒤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 두고 노인문제전문가로 나섰다. '야마토마치에서 만난 노인들' '마흔이 되기 전에 준비해야 할 노후대책7' '치매와 함께 떠나는 여행(번역)' '노후파산시대, 장수의 공포가 온다(공저)' 등을 썼으며 연령주의, 치매케어등을 연구하고 있다. 치매에 걸려서도 자기다움을 잃지 않으며 좋은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요양 현장을 만들기 위해 '사람중심케어실천네트워크'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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