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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곤의 재밌는 화약이야기]<11> 신라는 세계 최초 로켓 개발국인가?


서기 661년 5월 연개소문의 명령을 받은 고구려군은 한강 유역을 공격했다. 바로 전 660년 7월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직후였다. 백제부흥군의 활약으로 신라의 북쪽이 텅 비다시피 했다. 고구려의 한강 유역 침공은 한강 방어선 확보와 나당 연합군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고구려가 공격한 북한산성은 지금의 아차산성으로 해석한다.

오늘날 성곽으로 둘러싸인 북한산성이 아니라, ‘한강 북쪽의 한산성’(漢山城)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서울시와 구리시에 걸쳐있는 아차산은 해발 287m밖에 되지 않는 야트막한 산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강을 두고 뺏고 빼앗기는 혈투를 되풀이하던 삼국시대에는 전략적 요충지로 꼽히던 곳이다. 이 661년 아차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이 화약(?)을 사용했는지 의문시되는 기록이 있다. 1400년 전 사건이지만, 옛 문헌의 묘사는 너무나 생생하다. '삼국사기'에 단 한 번만 나오는 투석기 등을 동원한 공성전 기록이기 때문이다.

때는 고구려 보장왕 20년, 신라 태종무열왕 8년(문무왕 원년) 이야기다. 고구려 장군 뇌음신이 말갈족 장군 생해와 다국적 연합군을 편성해 신라의 칠중성(=파주)을 함락한 데 이어 술천성(述川城=경기도 여주 이포)을 공격했다. 아마 여주를 공략하면, 후방의 아차산성이 고립되므로 그런 전략을 펼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군은 술천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전공을 올리려고 한강을 타고 다시 내려와 공격 목표를 옮겨 아차산성을 쳤다.

TV 사극 속 공성전 장면 [사진=유지곤 제공]
TV 사극 속 공성전 장면 [사진=유지곤 제공]

◇ 삼국사기 유일한 투석기 공성전 기록

“고구려군이 포차(투석기)로 돌을 쏘아대니, 돌에 맞는 성벽과 집이 쉽게 무너졌다. 신라의 성주 동타천은 노포(대형 쇠뇌)를 쏘면서 방어했다. 또 마름쇠(철질려)를 성 밖에 던져 사람과 말이 다니지 못하게 했다. 안양사의 창고를 뜯어 성이 무너진 곳을 막고, 망루를 세웠다. 밧줄로 그물처럼 얽어서 소나 말의 가죽과 옷가지를 덮고, 그 안에 노포를 설치해 지켰다. 성 안에는 남녀 2800명이 있었는데, 성주 동타천은 백성을 잘 격려했다. 그러나 적은 강대했다. 20일이 지나자 식량도 떨어졌다. 이윽고 힘이 다해 지성으로 정성껏 하늘에 빌었다. 그러자 홀연히 큰 별이 고구려 진영에 떨어지고 뇌우(雷雨)가 진동했다. 드디어 적이 의심을 내고 두려워하며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이 정도 공성전이면 군사적 전략 전술과 판타지, 명장의 전설이 결합한 한 편의 드라마 수준이다. '삼국사기'를 통틀어 이 정도 구체적 전황 묘사는 드물다. 특히 포차까지 사용해서 성벽을 직접 때릴 정도의 격렬한 전투였다. 서양의 투석기와 비슷한 삼국시대의 ‘포차(砲車)’는 성벽을 부수거나, 성 안을 공격할 때 사용했다. 투석기는 원래 사람의 힘만으로 물체를 발사했는데, 남송 말기에 몽골에 의해 더욱 발전된 형태의 무게추를 사용한 투석기가 서방으로부터 도입된다.

한강을 내려다보는 아차산 능선 [사진=유지곤 제공]
한강을 내려다보는 아차산 능선 [사진=유지곤 제공]

'삼국유사' 태종 춘추공 편에도 이때의 전투 기록이 나온다.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평정하고 돌아간 후에, 신라왕은 여러 장수에게 명해 백제의 잔당을 추격하다가 한산성에 주둔했다. 그때 고구려와 말갈 두 나라의 군사들이 와서 포위하고 서로 공격했다. 5월 11일에서 6월 22일 사이에 우리 신라 군사가 매우 위태로워졌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와 의논하며 말했다. ‘무슨 좋은 계책이 없겠는가?’ 이렇게 망설이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김유신 장군이 달려와서 아뢰었다. ‘사태가 위급합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고 오직 신술(神術)이라야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성부산(星浮山)에 제단을 쌓고 신술을 썼다. 그러자 갑자기 큰 항아리만 한 광채가 단 위에서부터 나타나더니, 별처럼 북쪽으로 날아갔다.

◇ 김유신 장군은 마법사였나

그 무렵 한산성 안의 군사들은 구원병이 오지 않는 것을 원망하면서 서로 쳐다보며 울고 있을 뿐이었다. 적군이 급히 공격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어떤 광채가 남쪽 하늘로부터 날아와서 벼락이 되어 돌을 쏘는 석포 30여 곳을 부숴버렸다. 적군은 화살과 창이 박살이 났고 모두 땅에 엎어져 쓰러졌다. 한참 뒤에 깨어난 적군은 흩어져서 황급히 돌아갔고, 우리 군사들도 곧 돌아올 수 있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김유신 열전 편, '동국통감', '동사강목' 등에도 거의 비슷하게 묘사했다. 여러 기록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첫째, 661년 신라의 성주였던 동타천은 1만여 명 고구려군의 공격에 20여 일간을 견뎠다. 둘째, 군량과 힘이 떨어지고 위태롭게 될 때 별안간 벼락같은 빛이 일었다. 셋째, 고구려군은 함락 직전에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는 것이다. 이 전투가 끝난 후 성주 동타천은 12관등 ‘대사’에서 10관등 ‘대나마’로 승진해 대야(지금의 합천)에 있는 압독주로 옮겼다. 수성을 잘한 공으로 최전방 고구려 전선에서 후방으로 빠진 셈이다.

그런데 661년 아차산성 전투 기록에 나오는 한 부분이 관심을 끈다. ‘갑자기 큰 항아리만 한 밝은 빛(光耀)이 남쪽 하늘로부터 날아와 고구려군 진영에 벼락처럼 떨어졌다’라는 묘사가 화약 무기와 너무 흡사하다. 엄청난 빛을 발생하며, 폭발 때 큰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볼 때 화약이나, 혹은 가연성이 높은 무기일 것으로 짐작된다.

단순히 돌을 발사하는 투석기라면 신술이니, 천둥벼락 소리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유신 장군이 마법사도 아니고, 어쩌면 로켓형 화약 무기인 대형 화전(火箭)이나 질려포통처럼 폭발 무기일지도 모른다. 아마 신라의 구원 병력이 강력한 대형 쇠뇌(弩砲)를 사용해 화약통을 실어 보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실제 고려 때 벌어진 전투에서는 대형 쇠뇌로 화전(火箭)을 발사하기도 했다. 화전의 화살촉 뒤에 화약 주머니를 매달고, 여기에 불을 붙여 목표물에 닿을 즈음 터지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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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곤 대표 22세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유지곤폭죽연구소를 창업해 30대 시절 한국 대표 불꽃연출가로 활동했다. 독도 불꽃축제 추진 본부장을 맡아 활동 하면서 본인과 세 자녀의 본적을 독도로 옮긴 바 있으며, 한국인 최초로 미국 괌 불꽃축제, 하와이 불꽃축제 감독을 맡았다. 지금은 KAIST 미래전략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로봇 관련 스타트업을 운영하고 있다.

유기곤 대표
유기곤 대표

/대전=강일 기자(ki0051@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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