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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준의 이런 야구]박명환 '양배추 파동'의 기억


실소 가득했던 KBO 규칙위 회의…日서도 대응책 마련 '해프닝'

"허허, 무슨 장난도 아니고. 바쁜 사람들 모아놓고 이게 뭡니까."

11년 전인 2005년 6월21일. 필자는 무척 곤혹스런 처지에 놓였다. 이날 오전 10시 야구회관 회의실에서 열린 규칙위원회 회의 분위기는 실소와 황당함으로 가득했다. 한 자리에 모인 규칙위원들은 "이게 무슨 회의 안건이나 되느냐"며 혀를 끌끌 찼다.

지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지만 당시 회의 분위기는 꽤 험악(?)했다. 선수가 경기 도중 숨겨놓은 양배추를 떨어뜨렸다. 이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가 이날 규칙위의 안건이었다. 당시 KBO 운영부장으로 회의를 주재하던 필자는 위원들의 쏟아지는 질타에 한참 진땀을 흘렸다.

◆잠실에서 벌어진 황당한 사건

사연은 이랬다. 이틀 전인 6월 19일 잠실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 한화 이글스의 경기에서 두산 선발투수 박명환의 투구 도중 모자가 벗겨졌다. 그러자 모자 안에 대고 있던 양배추 한 잎이 그라운드로 떨어진 것이다. 전대미문의 사건에 모두가 어쩔줄 몰라 했다. 양배추를 이물질로 봐야 하는지가 논란의 핵심이었다. 이물질이 맞다면 부정투구 의심을 받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당시 박명환이 양배추를 쓴 이유는 단순했다. 더위를 이기기 위해서라는 게 그의 해명이었다. 남편이 더위에 힘들어한다는 사실에 안쓰러워 한 박명환의 부인이 한의사의 조언을 받아 양배추를 모자 속에 넣어두라고 전했다는 것이다. 양배추는 위에 좋은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더위에도 특효약이라고 한다. 해명에는 일리가 있었지만 규칙은 또 규칙이다. 타자의 시선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야구장이든 가운데 담장 바로 뒤에는 외야석이 없고 검정색으로 도배돼 있다. 하얀 공을 쳐야 하는 타자를 위한 야구장의 기본 설계다. 배경이 어두워야 투수가 던지는 하얀 공을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은막이라고 표현하는데 야구에서는 '흑막(黑幕)-백 스크린'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즉, 투수 주변의 흰색 물질은 타격 방해로 간주되어 야구규칙에 어긋난다. 문제는 양배추도 하얀색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이 규칙위반인지 여부를 KBO 규칙위원회에서 판단해야 했다.

◆KBO 운영부장의 업무

KBO 운영부장의 업무는 구단과 약간 차이가 있다. 구단 운영부장은 감독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면서 1군 등록·말소 및 연봉협상 등 선수들과 관련된 일을 주로 처리한다. 1월 중순부터 선수단 전지훈련을 시작으로 정규시즌, 11월 가을 마무리훈련까지 바쁘게 1년을 보낸다. KBO운영부장의 업무는 약간 다르다.

우선 프로야구의 1년 농사(시범경기, 정규시즌, 올스타전, 포스트시즌)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이듬해 거행될 리그의 모든 공식 경기일정을 편성하는 것이다. 우리프로야구 실정에 맞게 규정도 조정한다. 또한 시즌 중에는 원활한 경기진행을 위한 선수 및 팬들의 안전 확보, 황사와 복중 무더위 같은 날씨와 관련된 경기시작시간 조정도 다룬다. 야구규칙에 어긋나는 행위 발생 시의 대응과 선수의 해외리그 진출시 신분조회 등도 주된 업무다.

◆규칙위원회의 대응

양배추 논란이 불거지자 KBO도 즉각 대응을 했다. 공식야구규칙에 대한 협의구성체인 규칙위원회가 소집됐다. 위원장은 야구해설가 허구연 씨였고, 당시 KBO운영부장이던 필자가 당연직인 간사를 맡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위원들의 반응은 무척 당혹스러웠다. "양배추 따위가 회의 안건이나 되느냐"는 볼멘소리가 난무했다. 애써 위원들을 달래면서 회의를 진행했지만 정상적인 논의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여러 의견이 오갔지만 뚜렷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울 만큼 중구난방이었다. 시간만 하염없이 흘러갔다. 이때 회의실 분위기를 정리한 사람이 허 위원장이었다. 그는 미국야구의 사례를 인용했다. 과거 당뇨병이 있는 투수가 인슐린을 허리 뒤에 차고 공을 던지자 타자가 타격에 방해가 된다며 항의해 받아들여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박명환도 야구규칙에 위반되는 사항일 수 있지만 타자를 현혹시키기 위해 양배추를 일부러 떨어뜨린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설득했다.

위원들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회의 뒤 '박명환의 경우 더위를 식히기 위한 자신만의 행위였지만 양배추를 다시는 경기장에서 쓸 수는 없다. 단 의사가 의료행위에 필요하다고 처방을 내린 이물질은 총재의 사전 허가를 얻은 뒤 쓸 수 있다'는 회의 결과를 공개할 수 있었다.

◆NPB도 양배추 관련 긴급 논의

당시 사건은 해외토픽감이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이미 투수의 이물질 부착을 금지하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붙이는 파스와 손팔찌 등도 금지 물품이다. 미국인들은 파스의 개념을 모른다. 보통 '쑤신다'는 느낌이 들 때 붙이는 하얀색 파스는 일본의 '히사미쓰'라는 회사가 개발한 제품이다. '사론파스'라는 이름이 정식명칭이다. 한국과 일본에선 널리 쓰이지만 미국에선 구하기 힘든 의약품이다.

지금은 KIA 타이거즈 투수인 김병현이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시절 몸에 붙인 파스가 투구시 떨어져나가 '부정투구'로 퇴장당한 적이 있다. 타자의 타격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이물질인데다 파스가 흰색인 것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박명환의 양배추 사건을 김병현의 파스 사건과 같은 맥락으로 당시 외신에선 받아들였다.

일본의 반응은 의외였다. 일본프로야구(NPB) 사무국은 재빨리 규칙위원회를 개최했다. KBO의 대응 결과 등을 정확히 정리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양배추 사건 이후 마루야마(丸山) 당시 NPB 규칙위원장으로부터 잦은 연락을 받았다. 6개의 돔구장이 있지만 더위로 말하면 일본이 더 심하고, 양배추의 '열 진정' 효과가 사실이라면 일본 야구계에서도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일본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차원의 움직임이었다.

◆해피엔딩으로 끝난 해프닝

논란은 있었지만 큰 문제 없이 마무리된 해프닝이었다. 박명환은 프로 17년간 3개 구단에서 활약한 뒤 103승 93패 평균자책점 3.81의 성적을 남기고 지난 겨울 은퇴했다. 이젠 NC 다이노스의 코치로 변신해 후배들을 위한 길을 걷고 있다. 야구인생의 2막을 시작한 그가 지도자로 대성하기를 기원한다(편집자 주 : 박명환 자신도 양배추로 각인된 자신의 이미지가 아주 싫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경남 창원에 거주하고 있는 그는 마산 해안가에 '블루캐비지(blue cabbage)'라는 이름의 펍을 부업으로 운영하고 있다. 블루 캐비지는 우리말로 '푸른 양배추'라는 의미다.).

조희준

조희준은 20년 이상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야구행정을 다루며 프로야구의 성장과정을 직접 지켜봤다. 국제관계 전문가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출범 당시 한국 측 협상단 대표로 산파 역할을 맡았다. ▲일본 호세이(法政)대학 문학부 출신으로 일본 야구에 조예가 깊은 그는 ▲KBO 운영부장 및 국제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프로스포츠협회 전문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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