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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혜] '워라밸' 시대…새벽 배송에 제동을 걸고 싶다


[아이뉴스24 윤지혜 기자] "학생 미안한데 물 한 잔만 부탁해도 될까요? 실례인 줄은 아는데…."

검게 그을린 손으로 눈물 같은 땀을 닦아내며 택배기사가 말했다. 그의 뒤에는 성인 남성 허리춤까지 오는 상자 탑이 수레에 쌓여 있었다. 차가운 물을 건네자 택배기사는 물 마시는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단숨에 유리잔을 비웠다. 그는 연신 '미안하다', '고맙다'고 인사하며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현관문을 닫고 집안을 둘러보니 어디 하나 택배기사의 손을 빌리지 않은 것이 없다. 자잘한 생활용품과 패션 소품부터 12kg 생수(2Lx6개) 6묶음에 7kg짜리 수박, 선풍기 등 소형가전까지. 자연재해 수준의 폭염에 집 앞 마트조차 가기 싫어 온라인 쇼핑을 즐긴 탓이다. 익일배송은 물론 당일배송도 일상화된 대한민국에서 온라인쇼핑은 확실히 삶의 질을 높여줬다.

바꿔 말하면 물류센터 근로자와 택배기사들이 나 대신 흘려준 땀 덕분에 잠시나마 더위를 잊고 쇼핑의 즐거움을 맛봤다. 사실상 노동을 외주화한 셈이다. 어쩌면 '소비자 편의성 제고'라는 유통업계 사명 뒤에 숨어 누군가의 땀을 당연하게만 생각한 것은 아닐까. 그 후 나날이 급증하는 온라인쇼핑 거래액을 볼 때마다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이런 점에서 쿠팡의 새벽 배송 논란은 우리 사회 전체가 답해야 할 문제다. 전날 저녁에 주문하면 다음 날 오전 7시에 배송 완료되는 새벽배송은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심야 근무를 전제로 한다. 누군가는 깜깜한 어둠을 뚫고 물류센터에 나와 각종 상자와 씨름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졸음과 싸워가며 운전대를 잡는다. 바쁜 와중에도 민원을 의식해 발소리를 죽인다.

물론 일각에선 남들 다 일하는 낮엔 휴식시간이 주어지지 않느냐고, 주간 근로자와 근무시간은 같은데 야간수당이 더 붙어 월급은 늘어나니 좋은 것 아니냐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은 '일과 삶의 균형'이란 오늘날의 시대정신과 거리가 멀다. 잠자는 시간을 쪼개지 않으면 병원·은행에도 갈 수 없고, 어린 자녀의 어린이집 등·하원도 지켜볼 수 없다. 해 저물녘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거나 친구를 만나 하루의 고단함을 소주 한 잔에 털어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잠든 자녀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건 그야말로 사치다.

결국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현관문 앞에 놓인 식자재를 확인하는 나의 기쁨 이면에는 택배기사들의 노동, 그 이상의 희생이 자리한다. 나의 '워라밸'을 위해 누군가는 일과 삶의 균형을 포기하는 셈이다. 물론 여기에는 교통량이 적은 심야·새벽 시간대를 이용해 배송효율을 높이려는 유통사와 택배사의 경제 논리가 뒷받침된다.

새벽 배송으로 격화되는 유통업계 배송 전쟁에 감히 제동을 걸고 싶은 까닭이다.

패션업계에서는 의식 있는 소비를 뜻하는 '컨셔스 패션(Conscious Fashion)'이 뜬다. 옷을 살 때 '멋'뿐 아니라 환경과 윤리까지 생각한다는 뜻으로, 제조 공정상 저임금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는지도 고려 대상이다. 온라인쇼핑에도 이 같은 컨셔스 소비가 필요하지 않을까. 새벽을 달리는 택배 차를 멈출 수 있는 건 오직 소비자뿐이다.

윤지혜기자 jie@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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