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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서창녕]평양까지 인터넷으로(하)


 

북한을 방문하는 도중에 가장 감명 깊었던 순간은 역시 백두산 정상에 올랐을 때였다. 평양에서 백두산까지 고려항공 전세 비행기를 타고 직행했다.

필자는 서울에서 가져온 두꺼운 겨울 등산복과 등산화를 신고, 목에 수건을 칭칭 동여매고 단단히 등산준비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북측 안내원들은 깔끔한 신사복 차림에 넥타이를 매고, 구두를 신고 있었다.

해발 2,750미터 높이의 산을 오르기에는 부적절한 복장이었다. "안내원 선생들은 백두산 정상에 오르지 않습니까" 물었더니, "우리도 정상까지 올라갑니다"라는 대답이었다.

전세 비행기를 내려서 버스로 갈아타고 울창한 자작나무 숲을 가로질러 덜컹덜컹 비포장 도로를 따라 백두산 정상으로 향했다. 때로는 주변 경치를 구경하다가, 또 때로는 전날 밤 늦게까지 마신 술이 덜 깨서인지 가끔씩 졸기도 하다보니 어느새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필자는 백두산 정상까지 버스를 타고 올라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북측 안내원들은 양복 정장 차림으로 버스에서 내려 유유히 천지를 내려다보며 잡담을 하고 있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백두산은 약 100만년 전 화산 활동에 의해 생겨난 한반도 최고봉이다.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수많은 왕조와 국가들의 흥망성쇠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자기 자리를 지키며 끝없이 펼쳐진 대지를 굽어보고 있었다.

너무나 넓게 펼쳐진 눈 앞의 웅장한 모습을 바라보며, 필자는 하루빨리 우리 민족이 하나로 통일되기를 기원했다.

저녁에 청년호텔로 돌아오니 온 몸이 피곤했다. 하루 종일 관광을 해서, 온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샤워를 하고, 호텔 3층에 있는 술집을 찾았다. 아름다운 여성 접대원 3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북측이 자랑하는 백두산 들쭉술을 마시며 은근히 취기가 올라 젊은 여성 접대원들과 농담도 주고받고, 나중에 서울에 오면 꼭 연락하라면서 내 휴대전화번호가 적힌 명함도 건네 주었다.

실제로 우리가 만난 여성 안내원 중에는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응원단 자격으로 내려온 사람도 있었다. 필자는 먹다 마신 술 뚜껑을 닫은 뒤 따로 보관하라고 하면서 꼭 다음에 다시 와서 마시겠다고 약속을 했다.

평양의 마지막 밤은 노래방에서 보냈다. '화면반주음악실'이라고 부르는 이 곳에서는 아직 남측 노래가 없어서, 팝송을 불렀다. 노래방에서 만난 20살 여성 접대원은 우리들 노래에 반주도 맞춰주고, 자기가 나가서 먼저 노래를 불러 흥을 돋구기도 했다.

서구식 미의 기준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적인 시각으로 보면, 분명 신윤복의 미인도에 나올만한 그런 미인들이었다. 함께 기념사진도 찍고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4박 5일간 평양에 머물렀지만, 필자는 거의 4-5개월을 평양에 머무른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만큼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또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앞으로 평양을 방문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첫째 평양, 둘째 백두산, 셋째 묘향산을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특히, 묘향산에는 전세계에서 받은 선물을 모아둔 국제친선전람관이 있다. 국보급 문화재로 가득찬 박물관이자 보물창고인 셈이다.

주체사상탑, 개선문, 단군릉 등 웅장한 건축물도 있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평양의 순안공항은 너무나 초라하다. 길거리에는 자동차가 거의 없고, 평양의 밤거리는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하다.

분명 우리는 다른 점이 많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의 언어, 하나의 역사, 하나의 핏줄을 가진 하나의 민족이다. 필자는 통일을 위해서는 구동존이(求同尊異)의 자세, 즉 같은 것을 구하고 다른 것을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50여년간 갈라져 살았지만, 역시 우리는 하나였고, 또 앞으로도 하나일 수밖에 없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평양을 떠나던 마지막 날, 호텔 정문 앞까지 달려나와 우리를 환송하며 손을 흔들어주던 북측 여성들의 눈망울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선물가게에 들러 그동안 정들었던 안내원 선생들에게 담배 한 보루를 선물로 주었더니, 얼굴을 붉히며 감사해 하던 그 순수한 마음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평양공항을 떠나며 일행 중 몇 명은 눈시울을 붉히고, 또 몇 명은 흘러나오는 눈물을 애써 감추었다. "안녕~ 또 만나요."를 외치며, 조금씩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보며, 필자는 이것이 우리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상과 제도는 달라도 우리는 하나의 마음을 가진 하나의 민족이다. 비행기 밑으로 점점 작아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필자는 굳게 입술을 다물었다. 평양의 하늘은 언제나 그랬듯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끝)

/서창녕 아사달 사장 mail@asad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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