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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필의 'Feel']'추캥', 조용히 행동으로 보여주는 축구 사랑


스스로 재능기부, 불우이웃 돕기와 군 장병 위로로 희망의 아이콘 되다

[이성필기자] 프로축구 K리그의 한 시즌은 너무나 길다. 3월 정규리그가 시작해 11월 말에 끝난다.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한 팀은 2월부터 첫 경기를 치르고 승강 플레이오프에 나설 경우 12월의 '겨울 축구'를 경험하게 된다.

당연히 시즌이 종료되면 선수들은 잠시 축구화를 벗어놓고 푹 쉬거나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겨울에 축구대표팀 발탁이라도 된다면 휴식기 자유는 사실상 사라진다. 잘 쉬어야 또 다른 시즌을 준비할 수 있어 선수들은 적은 시간이라도 나면 알차게 활용하려 노력한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바보(?)들이 나타났다. 마냥 축구에만 매달리던 선수들이 봉사가 필요하다며 소중한 휴식을 마다하고 재능기부에 달려들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언론을 통해 알려진 K리거 중심의 '축구로 만드는 행복' 모임이다. 줄임말 '축행'을 소리 나는 대로 적어 '추캥'으로 불린다.

1999년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에서 시작된 추캥은 처음에 선수들이 회비를 걷어 불우한 학생들이나 보육원생을 도왔다. 행사가 점점 발전하면서 자선경기를 열어 조금이라도 '프로축구의 맛'을 느끼게 해주려 애쓰기도 했다. 오장은(수원 삼성)이 시작해 김신욱(울산 현대), 설기현(인천 유나이티드) 등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참가하려고 기를 쓰는 재능기부 형태의 봉사활동이 됐다.

기자는 지난 2012년 처음 추캥을 접했다. 당시만해도 추캥을 먼저 세상에 알린 동료 기자의 권유에 따라나선 취재였다. 마침 경남 진해의 해군 진해기지사령부에서 선수들이 1박2일 안보체험을 하기로 했다는 점에서 관심을 가질 만했다. 선수들 가운데는 병역혜택자도 있었고 또 상주 상무, 경찰청 등 일반 부대와는 다소 성격이 다른 곳에서 군 복무를 한 이들이 많아 더욱 궁금증이 컸다.

무엇보다 그 해 런던올림픽 일본과의 동메달결정전에서 이긴 뒤 '독도는 우리땅' 문구를 들어 국제올림픽위원회(IOC)로부터 A매치 2경기 출장 정지와 3천500 스위스 프랑(약 410만원)의 벌금 징계를 받은 박종우(부산 아이파크)가 독도함에 오르는 절묘한 장면이 연출된다는 점에서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당시 박종우는 자신에게 집중되는 관심이 봉사활동에 해가 될까 시종일관 조심스러워했다. 기자 역시 독도남의 독도함 방문이 '추캥'의 순수함과 선행을 가릴까 걱정이 컸다. 물론 극적인 '연출'에 관심이 가는 것은 기자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기우였다. 박종우는 장병들의 최고 인기스타였다. 같이 방문한 2002 한일월드컵 스타 송종국 현 MBC 해설위원조차 뒷전이었다. 경위야 어찌 됐든 박종우가 국위선양을 했다는 점이 국토 방위의 최전선에 선 해군 장병들에게는 크게 와 닿았던 모양이다. 이후 이어진 자선축구에서도 박종우는 일반 팬들로부터 큰 환대를 받았다.

자연스럽게 추캥도 축구계의 대표적인 선행으로 부각됐다. 선수들은 자발적으로 움직이며 추캥을 준비했다. 지난해 상주시민운동장에서 열린 추캥 행사도 1박2일이었다. 상주 시내 초등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일일 클리닉과 팬사인회를 열고 오후 자선경기를 치렀다. 첫날부터 합류하지 못했던 성남 선수들은 자가 운전으로 어렵게 시간에 맞춰 상주까지 달려와줬다.

참가하려는 선수들의 경쟁도 치열하다. 부상자는 회복을 위해 제외된다. 제 아무리 A대표라도 상관없다. 전년도에 참석하고도 다음해에 못하는 경우도 많다. 대부분 선수들은 소속팀에서 1년 중 주기적으로 벌이는 사회봉사활동에 연봉의 일부분을 기부하고 있지만 추캥을 위해 따로 회비를 모아 전달하는데도 앞장서고 있다. 개인 사정으로 불참해도 회비 갹출에는 군말없이 따른다. 4일 강원도 군부대에서 열린 올해 추캥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박종우는 3일 저녁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해 호텔에서 1박을 하는 열정을 보였다.

추캥의 의미를 알게 된 스포츠 쇼핑몰 두사커(나인티플러스)는 2012년부터 직접 선수들의 유니폼을 제작해 기증하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수원 삼성의 공식 구단 용품 제작사 DIF에서 사인볼을 제공하는 등 파급효과도 이어지고 있다.

물론 물품을 받아도 기증하는 과정의 수고는 온전히 선수들의 몫이다. 비시즌이라 구단 직원들의 도움이 없다보니 스스로 볼에 사인해서 나눠주고 세부 행사조율도 직접 하고 있다. 구단들이 선수들을 위해 어떤 식으로 노력하는 지를 추캥을 통해 체험하는 소중한 시간도 갖게 되는 셈이다. 특정 선수의 움직임과 이슈에만 관심이 있었던 기자에게도 선수들의 이런 진정한 노력을 보며 반성하는 시간이 됐다.

2년 전의 좋았던 기억을 되살린 추캥은 4일 중부전선을 수호하는 육군 5군단(군단장 임호영 중장)과 예하부대인 6사단, 8사단을 돌며 위문했다. 오전부터 저녁 늦게까지 이동과 하차를 반복하며 부대를 돌았지만 그 누구도 불만을 터뜨리지 않았다. 피곤함을 감추고 어떻게든 자신의 진정성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혔다.

선수들은 위문금 1천만원을 전달했다. 한국전쟁, 월남전 참전용사 20명에게 월 5만원씩 1년을 후원한다. 박건하 코치는 따로 기관총 5정 구매 비용을 자비로 내놓았다. 두사커에서는 5군단 부대 마크가 새겨진 유니폼 30벌을 지원해 임호영 중장과 지휘관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장병들 사이에서 박종우는 여전히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시킨 독도남'으로 기억되어 있었고 장병들의 촬영과 사인 요청 1순위였다. 김승규(울산 현대), 김진규(FC서울), 염기훈(수원 삼성) 등도 마찬가지였다. 임창우(대전 시티즌), 윤일록(FC서울) 등 인천 아시안게임 멤버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중부전선 최전방에서 복무하며 쌓인 장병들의 피곤과 긴장감이 선수들의 방문과 위로로 잠시 녹았다.

5군단 최강 간부 및 장병과 선수들이 벌인 족구 경기에서는 폭소가 쏟아지는 등 즐거운 시간이었다.

6사단 전방대대 한 소초에 근무하는 정병준 병장은 전역이 60일 정도 남은 특권으로 김승규, 김진규, 염기훈을 붙들고 기념 촬영을 했다. 정 병장은 "축구를 좋아하는데 국가대표 선수들이 올 줄은 몰랐다. 너무 기쁘다"라며 힘든 군생활에 활력소가 됐다고 소리쳤다. 추캥의 작은 관심이 장병들에게는 사기 고양으로 이어진 것이다.

'추캥'을 함께했던 장병들은 분명히 한동안은 실물로 본 선수들을 두고 이런저런 얘기꽃을 피울 것이리라. 축구에 관심이 없던 장병도 국가대표부터 K리그까지 대화의 장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 생각된다. 축구 사랑의 힘이 무엇인지 선수들은 이렇게 작은 행동으로 보여줬다.

임 중장의 말은 추캥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도 됐다. 그는 "우리도 군단 내 풀리그를 벌여 우승팀을 가리고 있다"라며 축구가 전투력을 끌어올리는데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이어 선수들에게 "아까 선수들을 환영했던 장병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그들이 21~23살의 어린 나이에 나라를 위해 재능을 희생하고 있기에 여러분들도 축구로 국위선양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병역혜택도 받을 수 있다. 크게 보면 군대와 축구는 모두 나라를 위해 존재한다. 잘 하면 국민들에게 사랑받고 못하면 지탄 받는다"라며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했다. 책임감을 갖고 축구 발전에 앞장서서 국민들을 즐겁게 해달라는 말이기도 했다.

이날 선수들은 아낌없이 재능을 소진하고 돌아갔다. 그 중에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이재명 구단주의 성남FC 선수들도 있었다. 이들은 성남FC 레인자켓을 입고 구단을 말없이 홍보했다. 진정한 축구 사랑은 성남 자켓을 입고 추캥에 참여해 조용히 장병들을 위로한 박준혁, 임채민, 이요한, 황의조가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조이뉴스24 철원, 포천=이성필기자 elephant14@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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