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뉴스


[조희준의 이런 야구]이치로와 마늘 논란


1997년 내한 당시 '마늘' 발언으로 논란 휩싸여, 그 진의는?

미·일 통산 4천258안타(21일 현재)로 피트 로즈의 메이저리그 역대 최다안타(4천256개)를 넘어선 스즈키 이치로(43, 마이애미 말린스)는 한국 팬들에게 몇 가지 오해를 사고 있다.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선수라는 것, 또 하나는 매우 민감한 문제인데, 마늘 냄새로 한국을 비하했다는 이유에서다. 이 자리를 빌려 그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풀었으면 한다. 그는 알려진 것과 많이 다른 선수이다.

◆이기적인 이치로?

이치로는 겉으로 보면 무뚝뚝하다. 언론 인터뷰도 그다지 친절한 편은 아니다. 할 말을 해야 할 때도 대개 단답형이다. 하지만 이치로는 속이 깊은 인물이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지만 야구선수는 봉급쟁이 아닌 봉급쟁이이다. 선수 각자가 따로 계약 기간을 정해서 연봉협상을 하지만 크게 보면 모두가 팀의 일원이다. 구단의 규율을 따르고, 팀의 대외 활동에 함께 참가한다. 홍수, 태풍 같은 사회적으로 큰 불행이 닥쳤을 때 연예인들은 각자의 이름으로 성금을 전달한다.

이와 달리 야구 선수들은 아무리 유명한 선수라도 소속 단체의 이름으로 뭉뚱그려 자선사업에 참가하는 게 일반적이다. 연예인들이 홍보를 개인적으로 하는 것과 달리 선수들은 구단에서 대외적인 이미지 관리도 담당해준다.

이치로는 예외였다. 지난 1998년 고향인 아이치현에 사회복지를 위해 1천만 엔, 효고현에 지진이 났을 때는 복구기금으로 1천만 엔을 각각 기부했다. 2000년에는 비 피해를 당한 아이치현에 티셔츠 등 1천300만 엔 상당의 현물, 2011년에는 동북지역 지진 복구를 위해 일본적십자사에 1억 엔의 기부금을 내기도 했다. 이 외에도 효고현 어린이 야구교실과 미국의 시애틀에도 기부를 하고 있다. 일본이 아닌 미국 구단 소속인 점도 감안해야겠지만 이웃의 불행을 남의 일로만 여겼다면 이런 선행은 생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늘 발언의 진위

또 하나는 한국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지난 1997년 한·일 프로야구 골든시리즈가 잠실구장에서 열렸다. 일본에서 개최된 '한·일 슈퍼게임'으로 양국간 프로야구 교류가 무르익을 시기에 비슷한 성격의 대회가 잠실구장에서도 열린 것이다. 일본은 주니치 드래곤스와 오릭스 블루웨이브가 연합팀을 조직해 내한했고, 한국은 당시 우승팀 해태 타이거즈를 주축으로 연합팀을 꾸려 참가했다. 물론 당시 일본에서 활약하던 선동열이 주니치 소속으로 한국을 방문한 것이 가장 큰 화제를 모았다. 흥행 여부는 차치하고 한국에서 일본 올스타들을 볼 수 있었던 자리였다. 이 대회에 당시 오릭스 선수이던 이치로도 참가했다. 한국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는 당대 일본 최고 스타였던 이치로에게 집중됐다.

당시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한 이치로는 대회 공식 기자회견 자리에서 방한 일성으로 "역시 한국에 오니 마늘냄새가 강하게 풍긴다"며 미소를 지었다. 기자회견장의 분위기가 싸늘해진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었다. "발언의 저의가 무엇입니까"라는 가시돋친 추가질문이 한국 취재진들 사이에서 이어졌다. 당시 자리에 있었던 필자는 좌불안석이었다. 이치로는 원래 인터뷰를 할 때 농담으로 웃음을 유발하며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사람이다. 그는 일본에 처음 입국하는 서양인들이 흔히 하는 "간장 냄새가 난다"는 조크에 비유해 마늘이라는 단어를 꺼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제쳐놓고 그의 마늘 발언만 놓고 보면 한국을 비하하는 뉘앙스로 비쳐진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치로 본인의 의도와 달리 다음날 각종 언론에선 마늘이라는 단어가 부각되며 날선 기사들로 도배됐다. 마늘냄새를 한국 사람들이 민감해 한다는 점을 알지 못한 건 이치로 개인의 무지로 볼 수 있다.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남의 나라에 가서 의도적으로 그 나라를 비하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치로도 웃어 넘기자고 한 소리가 본의 아니게 우리의 '아픈 구석'을 찌르면서 불필요한 논란으로 확대된 셈이다.

이치로를 이 자리에서 두둔할 생각은 없지만 그의 발언의 배경에 대해서는 뒤늦게나마 알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치로도 자신의 속뜻과 달리 논란이 된 한국내 반응에 당황했는지 본경기에서 1회초 우익수 수비만 마친 뒤 경기에서 빠졌다. 타석에는 들어서지 않은 채 일본으로 향했다.

◆고향팀 주니치의 외면

이치로는 1973년 10월 2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V9(1965년~1973년, 9년 연속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던 날 나고야가 있는 아이치현에서 태어났다. 지역을 대표하는 야구 명문고인 아이코다이메이덴고교(愛工大名電高校 : 나고야 전기가 설립한 대학 부속 고교)에 진학한 그는 고교시절 지역 유명선수였다. 1학년부터 3루수를 보며 1·3번 등 상위 타선을 맡았다. 2학년 때는 꿈에 그리던 여름 고시엔에 좌익수로 출전한다. 3학년 때는 봄 고시엔에 투수로서 출전한다.

두 번 꿈의 무대에 섰지만 팀은 1회전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고교시절 전국무대에서는 뚜렷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고교 3 년간 지역대회를 포함한 통산 성적은 타율 5할1리(536타수 269안타) 19홈런에 2루타 74개, 도루 131개였다. 압도적인 기록이었다. 이치로는 원래 투수였는데 작은 교통사고(자전거 통학 중 자동차 접촉사고)로 야수로 전환했다. 1991년 일본프로야구 신인선수 지명회의에서 오릭스 블루웨이브(현 오릭스 버펄로스)에 4위로 지명받아 프로에 발을 내디뎠다.

당시 오릭스 2군 운영담당이었던 나카무라 준(中村 潤) 현 오릭스 관리부장(한국의 운영부장)에게 지명 당시 일화를 물어보자 이렇게 답했다.

"이치로 본인은 지역 연고팀 주니치 드래곤스의 지명을 희망했다. 하지만 주니치의 스카우트는 이치로를 투수로 염두에 뒀는데, 가능성을 높이 보지 않아 지명을 포기했다. 만약 주니치가 지명했더라면 이치로의 인생이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릭스 구단 스카우트는 이치로의 투구가 아닌 타격센스를 주시하고 장래성을 인정했다. 드래프트 4순위로 지명했다. 결과론이지만 지명회의 후 주니치 스카우트는 언론과 팬들로부터 적잖은 비난을 받았으며, 오릭스 스카우트에게는 반대로 큰 찬사가 쏟아졌다."

◆오기 감독과의 만남

프로에 입단한 이치로는 2군 첫 시즌에서 곧바로 수위타자로 등극한다. 신인선수가 2군 수위타자에 오른 것은 1960년 다카기 모리미치(高木守道) 이후 31년 만이었다. 스타선수로 가는 첫 걸음이었다. 그러나 당시 오릭스의 수장이었던 도이 감독은 타격 폼 수정 등 많은 요구조건을 내걸며 이치로를 중용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입단 3년까지 1군에서 이렇다 할 성적은 없었다.

이러던 중 니시테쓰 라이온스(현 세이부 라이온스)의 명 2루수 출신인 오기 아키라(仰木 彬, 1935~2005)가 1994년 오릭스 감독으로 부임한다. 오기 감독은 구단 홍보담당과 같은 마인드의 소유자였다. 팀 성적도 중요하지만 구장을 찾는 팬들에게 매 경기 어필할 수 있는 여러 아이디어를 내놓은 '열린' 감독이었다.

이치로를 눈여겨 봤던 오기는 이치로의 성 스즈키가 너무 흔하니 성을 빼고 이름만으로 선수 등록을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로 인해 이치로는 오늘날 고유명사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보자면 김철수라는 선수를 '철수'라고만 등록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기 감독은 기술적으로 이치로를 터치하지 않았다. 본인의 폼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면서 개성을 살리는데 일조했다. 이 시기부터 이치로는 1군 성적이 두드러지게 향상됐다. 1996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하는 등 팀의 간파스타로 완전히 자리매김한다.

오릭스는 인기 구단인 한신 타이거스와 같은 오사카 인근 간사이 지역을 본거지로 뒀다. 만약 이치로가 한신 선수였다면 그의 일본 내 인기는 더욱 하늘을 찔렀을지도 모른다. 사실 일본에서는 최고 인기구단인 요미우리와 인연이 없었던 관계로 마쓰이 히데키(전 요미우리·뉴욕 양키스)에 비해 주목도가 떨어지는 감이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시아에서는 그릇이 큰 타자가 없다'는 메이저리그의 편견을 깨면서 일본인들이 큰 자부심을 가지게 된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감은 너무도 선명하다.

◆자기 관리의 신

이치로는 1995년부터 TBS라디오 프로그램인 '이치로의 기분은 언제나 풀 스윙'이라는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했다.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인 후쿠시마 유미코는 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아이돌 아나운서였다. 우리나라 노현정 전 아나운서와 좋은 비교대상인 그는 이치로보다 무려 8살 연상이기도 하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이치로의 여러 인터뷰는 후쿠시마가 거의 도맡아서 진행했다. 1997년부터는 두 사람의 개인적 교제가 보도되기 시작했고, 1999년 12월 미국 산타모니카에서 약 20명의 가족들 앞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 2세가 없다. 유일한 가족인 애견과 생활하고 있으며, 후쿠시마는 결혼 이후 공식 석상에 나온 적이 거의 없다. 평범한 전업 주부로 조용히 지내고 있다.

일본의 어느 야구인은 "이치로가 유명한 또 하나의 이유는 '부상 당했다는 뉴스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타석에서 몸에 맞는 공이 적고, 도루를 많이 시도하는 선수임에도 주루 도중 다치는 일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요즘은 다소 늘어났겠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스무살 때 허리사이즈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말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4천개가 넘은 안타 이상으로 대단한 점이 바로 이것이다. '타격 기계'라는 수식어를 넘어 '자기 관리의 신'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이치로는 알면 알수록 여러가지 의미에서 대단한 선수다.

조희준

조희준은 20년 이상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야구행정을 다루며 프로야구의 성장과정을 직접 지켜봤다. 국제관계 전문가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출범 당시 한국 측 협상단 대표로 산파 역할을 맡았다. ▲일본 호세이(法政)대학 문학부 출신으로 일본 야구에 조예가 깊은 그는 ▲KBO 운영부장 및 국제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프로스포츠협회 전문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2024 트레킹





alert

댓글 쓰기 제목 [조희준의 이런 야구]이치로와 마늘 논란

댓글-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로딩중
포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