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뉴스


[조희준의 이런 야구]장기영과 재일교포 학생 야구단①


초창기 한일 야구교류 초석…신문 홍보·선진야구 소개 명분

한국야구의 역사를 논할 때 '백상' 장기영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언론인이자 체육인, 그리고 경제관료로서 한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그는 한국야구가 오늘날의 반열에 오르는데도 크게 공헌했다.

야구사에 미친 그의 여러 업적 중 주목할 부분이 재일교포 학생야구단 초청 경기다. 재일교포 야구단의 결성과정과 이들을 초청하게 된 배경 등을 2회에 걸쳐 연재한다.

조희준 한국프로스포츠협회 전문위원은 최근 한양대학교대학원 글로벌스포츠산업학과에서 '한국야구발전에 기여한 백상 장기영 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 위원의 논문에서 일부를 발췌·편집했다. (편집자 주)

◆선린상업의 추억

장기영은 학창시절 선린상업학교(현 선린인터넷고)를 다니며 야구에 강렬한 매력을 느꼈다. 그는 재학 중이던 1933년 특별한 장면을 목격한다. 모교 선린이 여름 고시엔대회의 조선지역 예선인 '제13회 전선중등학교야구대회(全鮮中等學校野球大會)' 결승에서 목포상업을 5-1로 제친 것이다. 우승팀 자격으로 선린은 일본 본토에서 열리는 고시엔 본선에 당당히 출전했다. 당시는 식민지 시대로 조선은 '일본의 일부'로 여겨졌다. 모교의 우승은 훗날 장기영이 '마케팅 수단'으로서 야구의 잠재력을 크게 고려하게 된 주요한 요인이었다.

1954년 한국일보를 창간한 장기영은 그래서 야구, 그 중에서도 이웃에 있으면서 야구열기와 수준이 남다른 일본 야구를 주목한다. 새롭게 만든 매체를 홍보하고, 일본 야구를 한국에 소개한다는 공익적 차원에서 그는 일본팀 초청 경기를 기획한다. 그러나 실제 일을 추진하려니 난관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당시 한국은 일본과 수교국이 아니었다. 더구나 강경한 반일주의자인 이승만 대통령 시절이었다. 일본과의 모든 교류는 사실상 중단돼 있던 때였다.

여기에서 장기영은 '발상의 전환'을 이루어낸다. 일본에서 뛰는 일본 야구 선수이지만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면 문제가 없을 것으로 봤다. 바로 '재일교포' 야구선수들에게 주목한 것이다. 전 한국일보 체육부 기자 조동표는 "장기영은 일본야구의 맛을 느끼기 위해서 재일교포와의 경기를 생각했다. 당시 재일교포 선수들의 야구수준이 꽤 높았던 것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이유"라고 말한다.

1945년 한반도는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했다. 그러자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은 '내 나라'에서 살기 위해 귀국을 서둘렀다. 그러나 5년 후 벌어진 6.25 전쟁의 영향으로 한반도는 쑥대밭이 됐고, 혼란은 계속됐다. 마음 편히 돌아와서 살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었다. 일본에서 벌어들인 재산의 반출이 제한된 까닭에 귀국을 포기한 사람도 많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일본에 주저앉은 사람의 숫자가 무려 60만명에 달했다. 이들은 대부분 '재일 코리언' 신분으로 일본 열도에 정착했다.

◆일본에 남은 '재일 한국인'

재일교포와 관련한 당시 시대상황을 잠시 살펴보자. 1945년 광복과 함께 일본에 거주하던 교포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 '재일조선인대책위원회' 등 몇 개의 단체를 조직한다. 9월 10일 '재일조선인연맹 중앙위원회'가 결성되나 민족진영(권혁주)과 공산진영(김정홍)으로 분열됐다. 10월 15일 김정홍의 공산진영은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을 결성하면서 좌익단체로 활동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 1월 주일한국대표부가 설치된다. 이 때를 맞춰 권혁주의 민족진영은 재일조선인연맹 중앙위원회를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개명하면서 재일교포 영주권에 대한 법적근거 마련과 본국정부와의 유대 강화를 위해 나선다. 반면 조련은 1955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로 조직되면서 재일교포의 귀국사업과 생활지원, 우리말 강습 등의 사업 등을 활발히 진행했다.

이렇게 일본에 남은 사람들 가운데 야구를 하던 선수들은 상당수 일본이름을 사용했다. 이 때문에 한국계라는 사실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재일 한국인은 고교부터 프로에 이르기까지 일본 야구계에서 크게 활약했고, 지금도 적지 않은 한국계 선수가 일본팀에서 뛰고 있다.

장기영은 이들 재일 한국인들에게 주목한 것이다. 1954년 신생매체 한국일보의 언론사주가 된 그는 신문부수 확장과 선진야구 소개라는 명분으로 야구에 눈길을 돌렸다. 여름 고시엔대회에 참가하지 못한 재일 한국인 고교생들을 모아 재일교포 학생야구단을 결성, 한국에서 순회경기를 가진다는 기획을 입안했다. 이것이 '재일교포 학생야구단 모국방문경기'의 시작이었다. 이 대회는 한국 학생야구발전은 물론 국내 야구인기 상승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1956년 7월28일 토요일 한국일보 3면에는 '본사가 보내는 공전(空前)의 대구연(大球宴)'이란 특집물이 실렸다. 참가선수 프로필 및 사진 등 선수단 면모와 이들의 일정을 자세히 소개했다. 장기영은 단순히 야구경기에 그치지 않고 교포선수들의 '정체성 확립'이란 부분에도 주목했다. 경무대 예방, 논산훈련소 입대, 진해 해군기지 방문, 해병대 1일 입대 등 이들이 경험하지 못한 다양한 행사를 준비했다. 짧은 체류기간 동안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란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②편은 21일 게재>

조희준

조희준은 20년 이상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야구행정을 다루며 프로야구의 성장과정을 직접 지켜봤다. 국제관계 전문가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출범 당시 한국 측 협상단 대표로 산파 역할을 맡았다. ▲일본 호세이(法政)대학 문학부 출신으로 일본 야구에 조예가 깊은 그는 ▲KBO 운영부장 및 국제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프로스포츠협회 전문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alert

댓글 쓰기 제목 [조희준의 이런 야구]장기영과 재일교포 학생 야구단①

댓글-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로딩중
포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