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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i의 과학향기] 눈 감고도 푼다? - 천재수학자 오일러 이야기


 

2006년 독일 월드컵의 공인구로 지정된 '팀가이스트'는 기존의 축구공들과는 달리 '오일러의 공식'을 만족시키지 않는다고 하여 화제가 되었다. 오일러의 공식이란 다면체에서 '꼭짓점의 수―모서리의 수+면의 수=2'라는 공식이 항상 성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간단하게 정사면체를 생각해 보면, 정삼각형 4개로 이루어진 정사면체는 4-6+4=2가 되어 오일러의 공식을 만족시킨다. 마찬가지로 기존의 축구공들은 정육각형 조각 20개와 정오각형 조각 12개를 이어 붙여 만든 32면체이므로 60-90+32=2가 되어 역시 오일러 공식에 충실한 것이다.

그런데 팀가이스트는 이전의 축구공과는 달리 14개의 조각만으로 만들어졌다. 게다가 조각들의 모양도 기하학적으로 단순한 다각형 모양이 아니다. 즉, 월드컵 트로피를 둥글게 단순화한 모양의 조각 6개와 삼각 부메랑 모양의 조각 8개로 구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축구공을 이렇게 만든 이유는 이음매가 적을수록 공의 반응성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조각과 조각이 이어진 자리는 울퉁불퉁해서 선수가 킥을 해도 원하는 것과는 달리 엉뚱하게 날아갈 확률이 높다. 다시 말해서 완벽하게 둥글고 매끈한 표면을 가진 공일수록 어디를 차든 동일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팀가이스트는 조각들이 모인 접합점의 수와 조각들 사이의 이음매 수를 최대한 줄여 정확성을 높였다고 한다.

여기서 화제가 되는 '오일러의 공식'은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오일러'라는 사람이 밝혀낸 수학적 정리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수학사에 단연 빛나는 업적을 남긴 위대한 수학자이자 인간적으로도 귀감이 될 만한 훌륭한 인물이었다. 오늘 이야기는 바로 오일러에 대한 것이다.

1727년 프랑스 학술원은 그 해의 논문 경연대회에서 약관의 20세 청년에게 2등상을 주었다. 그가 제출한 논문은 돛대의 이상적인 위치를 결정하는 방법을 논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수학자는 돛대나 배는 커녕 바다도 본 적이 없는 내륙국가, 스위스 출신이었다. 그가 바로 오일러다.

그가 수학사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난데, 오늘날 표준으로 쓰이는 대부분의 기호나 용어들의 대다수는 그가 처음 만들어낸 것이다. 예를 들어 삼각함수를 나타내는 약어 sin, cos, tan 나 자연로그의 밑을 나타내는 상수 e도 그가 고안한 것이다. 그리고 원주율 기호 π(파이)도 처음 쓴 사람은 윌리엄 존스(1675-1749)지만 오일러가 사용하면서 표준으로 굳어졌다. 함수를 f(x)로 나타내는 것도 그가 창안했다. 게다가 그의 이름이 붙은 수학적 정리도 무척 많다.

한 마디로 현대 수학을 논할 때 오일러를 빼 놓으면 아예 논의가 성립되지 않을 정도인 것이다. 그렇듯 그는 선배들은 물론이고 그와 동시대의 수학자들 중에서도 단연 발군의 실력을 지녔기에 '해석학의 화신'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그런데 이 교우 관계는 나중에 오일러가 대수학자로 성장하는데 적잖은 영향을 끼친 듯 하다. 이들 형제는 스위스에서도 알아주는 수학자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형제의 아버지는 역시 수학자인 요한 베르누이라는 사람이었고, 그들의 큰아버지는 '베르누이의 정리'로 유명한 수학자 야콥 베르누이였다. 야콥 베르누이와 요한 베르누이 형제는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의 첫 외국인 회원으로 동시에 선출된 기록을 지니고 있을 정도로 수학자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이런 훌륭한 지인들이 있었기에 오일러의 타고난 재능은 더 빛을 발하게 되었을 것이다.

오일러가 수학자로서 이름을 날리게 된 것도 다니엘과 니콜라우스 형제 덕분이다. 이들은 러시아 여왕 에카테리나 1세를 설득하여 오일러를 러시아로 초빙하게 했는데 오일러 나이 20세 때의 일이다. 초빙 수학자가 너무나 젊어서 사람들의 시선에 의혹이 담겼을 지도 모르지만, 수학적 재능은 원래 나이와 무관한 법이다.

당시 러시아 학술원에서는 천문학의 난제 하나를 제시하고 학자들로 하여금 답을 구하게 했는데, 아무도 해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오일러는 자기만의 독창적인 방법을 적용하여 단 사흘 만에 해답을 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호사다마였을까, 이 일로 그의 명성은 높아졌지만 불행의 씨앗도 되고 말았다. 젊었던 그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무리한 양의 작업을 계속 떠맡아야 했고, 그러다가 그만 오른쪽 눈이 멀고 말았던 것이다. 지도 작성에 열중하던 1738년의 일이다. 눈에 이상이 일어났을 때 즉시 휴식을 갖고 요양을 했더라면 모르지만, 그는 추운 러시아에서 계속 지내다가 결국 영영 시력을 회복하지 못하게 되었다.

1741년에 오일러는 다시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빙으로 프로이센 왕국의 베를린으로 간다. 베를린에 학사원을 부흥시켜 예술과 학문의 발전을 후원하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학사원의 수학부장을 맡은 오일러에게도 극진한 대접을 해 주었다. 그런데 당시 러시아의 여왕 에카테리나 2세가 또 오일러를 청했다.

오일러로서는 한쪽 눈의 시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던 러시아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겠지만, 여왕의 초빙 권유가 집요한데다 베를린 학사원에서는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과의 불화도 있었다. 결국 오일러는 1766년에 자신의 후임으로 프랑스의 대수학자 라그랑주를 추천한 뒤 다시 러시아로 간다. 그런데 그에게 또다시 불운이 닥치고 말았다. 러시아의 혹한에 남은 한쪽 눈마저 멀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오일러의 위대함은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더 빛을 발했다. 그는 두 눈이 안 보이는 조건에서도 머릿속에 든 기억과 지식만으로 수학 연구를 계속했던 것이다. 그는 장님인 채로 하인에게 구술 작업을 시키는 방법 등으로 열의를 이어간 끝에 새로운 저술을 내놓기도 했다. 게다가 집에 화재가 나서 그동안 축적한 모든 연구 자료며 책 등이 몽땅 잿더미로 변해버리는 일까지 겪었지만 그의 열정은 그칠 줄 몰랐다.

오히려 화재 뒤에 이전에 나온 책을 더 보완하여 새로이 출판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 모든 게 두 눈이 안 보이는 노인이 이룬 것이라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오일러는 1783년에 손자와 놀면서 천왕성의 궤도를 계산하다가 '죽는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향년 76세였다. 마치 '보통 사람들이 숨 쉬듯이, 새가 하늘을 날듯이' 일상적으로 수학 연구에 몰두했다던 그의 열정과 집념은 분명 우리에게 훌륭한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재능이 아닌, 집념과 열의만으로도 그는 위대한 인물로서 추앙받기에 손색이 없는 것이다. (글 : 박상준 - 과학 칼럼니스트)

/ * 출처 :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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