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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고려 vs 왜구'와 최무선의 '국산화' 프로젝트
2019년 08월 16일 오전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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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뉴스24 조석근 기자] 한·일 경제전쟁이 범국민 최대 현안이다. 진짜 전쟁 얘기를 해보자. 고려의 마지막 황혼기였던 1380년의 일이다. 전북 군산 앞바다로 왜구들이 집결했다. '왜구'는 한반도와 남중국 등 동아시아 일대를 쓸고 다닌 해적 무리를 일컫는다. 해적이라고 해도 이 시기 왜구들은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의 잭 스패로우 패거리나 아덴만의 소말리아 출신 소규모 무장세력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군산 앞바다를 차지한 왜구는 500척의 대선단을 이룬 고도로 훈련된 병력이다. 말이 해적이지 약탈에 동원된 정예군과 다름없다. 맞서는 고려의 수군은 불과 100여척. 망해가는 고려가 간신히 끌어모은 함대다. 패배할 경우 서·남해 제해권이 넘어갈 절체절명의 위기지만 이 전투는 고려군의, 전대미문의 압승으로 끝난다. 왜구들의 대선단은 단 한 척도 예외 없이 불탔다. 역사는 이 사건을 '진포해전'이라 부른다.

진포해전 당시 수군 지휘관은 최무선이다. 기나긴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화약을 '국산화'한 인물이다. 무기화할 수 있는 화약만이 아니라 화약을 이용한 화포류와 로켓의 일종인 화전(火箭) 등 각종 화기 개발과 양산, 실전 배치는 물론 전술교리까지 확립시킨 놀라운 인물이다. 동아시아 방위산업 역사의 '스티브 잡스'라고 부를 만하다.



최무선의 국산화 업적은 진포해전이라는 단일 사건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듬해 경남 남해군을 침공한 100여척의 왜구 선단을 또 다시 섬멸시켰다. 최무선은 수년 후 왜구들의 기착지인 대마도 정벌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200년 후. 한반도 연안 환경에 최적화된 조선군의 함선은 대량의 함포를 탑재하고 있었다. 세계 전쟁사에 길이 빛날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해전의 결과를,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반도체·디스플레이를 비롯한 제조업 각 분야의 소재 국산화 필요성에 대해 요즘처럼 절실하게 제기된 적은 없었다. 지난 7월 4일 일본의 EUV 포토레지스트, 고순도 불화수소, 불화 폴리이미드 등 필수소재 3종의 수출규제를 시작으로 제조업 현장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연간 100조원의 반도체 산업이 불과 1천억원 내외의 소재 수급 차질로 흔들릴 수 있다는 진단에 국민들은 아직도 어리둥절하다.

물론 국내 산업계의 국산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불화수소의 경우 국내 정밀화학 업체들의 제품에 대한 반도체 업체들의 테스트가 진행 중이다. 수출규제 대상인 99.999% 이상 고순도 제품 기술도 국내 업체 일부가 보유한 상황이다. 불화 폴리이미드는 이미 국내 소재업체들이 양산을 준비 중이다.

대일 의존도가 가장 크다는 포토레지스트 분야의 경우 가장 고급기술을 요하는 EUV 공정용은 당분간 대체가 어렵지만 D램, 낸드용 포토레지스트는 국내 조달이 가능하다. 삼성과 SK하이닉스가 세계 최첨단 공정을 앞서 개발할 동안 국내 소재업계도 손을 놓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반도체 업계에서 일본발 공급망 우려가 제기된 것은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반도체 웨이퍼, 포토마스크, 불화수소 등 핵심 소재 업체들의 공장이 줄줄이 파괴됐다. 전대미문의 자연재해로 인한, 지금 수출규제보다 훨씬 불가항력적 원인이다. 당시에도 국내 반도체 업계의 소재, 부품, 장비 등 50% 이상이 일본에서 들어왔다.

필수소재, 부품의 국산화 요구는 당시에도 심각하게 대두됐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한양대 교수)에 따르면 반도체 장비의 경우 국산화율은 2013년 21%에서 2017년 18%로 오히려 떨어졌다. 소재 국산화율도 2011년 48%에서 현재까지 40%대 후반으로 별다른 변화가 없는 상황이다. 동일본 대지진 피해가 수습되면서 국산화를 이끌 정부의 관련 예산, 국책과제 규모는 오히려 더 줄었다는 분석이다.



세계는 보호무역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경제전쟁을 치르는 나라가 한국과 일본만은 아니다. 글로벌 G2, 미·중의 무역전쟁은 세계경제 최대 이슈다. 미·중의 관세장벽 이면에는 미국의 5G, 반도체 등 중국 첨단기술에 대한 견제가 숨어 있다. 유럽연합(EU)은 영국의 '노 딜 브렉시트'로 골머리를 앓는다. 유럽이라는 통합된 단일 시장보다 자국 경제가 우선인 유럽 내 각 민족주의적 우파 정부들이 영국의 최종 선택을 지켜보고 있다.

아베의 도발은 한국을 이같은 보호무역의 최전선으로 불러들였다. 우리 정부는 일본을 비롯한 특정국가 의존도가 높은 100여개 품목에 대해 연간 1조원 이상을 투자하고 해외 기업에 대한 M&A도 적극 지원한다는 입장이다. 소재, 장비 국산화를 주장하는 것은 현 정부만은 아니다. 역대 정부가 원천기술, 기초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나름 수조원의 R&D 예산을 집행했다. 연간 20조원 규모의 국내 R&D 예산은 재정규모 대비, 즉 외형적으로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다.

최무선의 국산화 프로젝트는 결코 단기간에 이뤄진 게 아니다. 그 구상부터 화약과 병기류 개발, 실험, 양산까지 수십년이 걸렸다. 고려는 망해가고 있었다. 재정지원과 실무부서 설치를 위한 끊임없는 설득 작업은 치열했고 번번이 문벌귀족, 군 기득권과 부딪혔다. 화약을 이용한 불꽃놀이는 봤어도 병기로 사용한 "전례가 없다"는 이들의 집요한 편견이 가장 큰 장애물로 작용했다.

국산화는 결국 의지와 시간의 문제다. 그 많은 계획과 요구들이 일본의 수출규제 사태가 잠잠해진 이후 언제 그랬냐는 듯, 마치 동일본 대지진 이후처럼 잦아든다면 몇 년 후 한국은 더 크게 당할지도 모른다. 지금 세계가 돌아가는 모습이 그렇다.

/조석근 기자 mysun@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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