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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현]정도전, 홍명보, 그리고 월드컵


[김익현기자] ‘민본혁명’을 꿈꿨던 정도전은 이성계를 주군으로 모신다. 이성계라면 민본의 대의를 실현할 인물이라고 판단한 때문이다. 하지만 역성혁명을 꿈꾸는 정도전과 이성계 앞엔 큰 산이 가로막고 있다. 고려의 충신 정몽주였다.

둘은 어떻게든 정몽주와 함께 하고 싶었다. “정몽주가 없는 혁명은 대의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방원의 생각은 달랐다. 대의보다 권력이 먼저였던 것. 결국 방원이 나서서 정몽주를 제거한다.

그 사건 이후 정도전과 이성계는 방원을 사갈시한다. 명분없는 행동을 한 자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기 드라마 ‘정도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저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얼마나 일치하는 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 축구대표팀이 2014 브라질월드컵 16강 탈락이 확정되던 순간, 난 엉뚱하게도 드라마 ‘정도전’ 속 한 장면을 떠올렸다.

인내심 부족한 독자들을 위해 속내를 먼저 털어놓자. 한 때 한국 축구의 미래 희망으로 꼽히던 홍명보 감독이 졸지에 공공의 적으로 전락했다. 전술적 판단에서 나왔을 선수 기용은 어느 순간부터 ‘으~리 축구’란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그 얘길 꺼내기 위해 ‘정도전’ 속 한 장면을 거론했다.

◆ 성과 못지 않게 중요한 명분

"소속팀에서 꾸준히 활약하는 선수를 대표팀에 발탁한다.”

1년 여 전 홍명보 감독이 내세운 원칙이었다. 팀에서 꾸준히 뛴 선수라야 큰 무대에서도 제대로 활약할 수 있다는 원칙.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명분이었다.

하지만 이후 선수 선발 과정에서 비판이 쏟아졌다. 박주영을 비롯한 몇몇 선수들이 중용된 데 대한 비판이었다. 역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비판이다. 당시 사정이 홍 감독이 내세운 원칙과 다소 달랐기 때문이다.

좀 더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자. 축구는 잘 모르지만, 난 홍감독이 충분히 그 정도 원칙은 깰 수 있었다고 본다. “다른 요소도 고려하겠지만”이란 단서 조항을 달았더라면 더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전 받들듯이 처음 세운 원칙에 얽매이는 것도 리더로서 바른 자세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분을 꺾었을 땐 그게 정당했다는 걸 입증할 책임이 따라붙는다. 이번 월드컵에서 많은 팬들이 비판을 쏟아내는 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난 홍 감독이 절대로 ‘으~리 축구’를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느 누가 월드컵이란 큰 무대에 오르면서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겠는가? 영광과 비난이 종이 한 장 차이로 기다리고 있는 독이 든 성배인데.

하지만 홍 감독은 정당성을 입증하는 덴 실패했다. 원칙을 깬 것이 정당성 있는 결정이었다는 걸 보여주지 못했단 얘기다. (역시 보통 축구팬이란 전제를 깔고 한 마디. 내겐 홍 감독이 마지막 경기에서 박주영 등을 선발 제외한 게 다소 의아하게 보였다. 박주영 선수는 홍 감독 전술에서 핵심이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비극의 씨앗이 된 정당성 없는 결정

다시 ‘정도전’ 얘기로 돌아가보자. 조선 왕조를 세운 이성계는 세자 책봉을 서두른다. 당시 조정의 여론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시절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세우고, 난세에는 공이 많은 왕자를 세워야 한다."

저 원칙대로라면 세자 후보는 둘 중 한 명이다. 태평성대일 경우엔 세자 자리는 장자(이방과)의 몫이었다. 개국초라 아직 난세라고 판단했을 경우엔 건국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해야 했다. 하지만 태조의 선택은 달랐다. 총애하던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낙점했다.

이후 얘기는 우리가 잘 아는 쪽으로 흘러간다. 1, 2차 왕자의 난이 연이어 터지면서 이방원이 조선의 3대 임금이 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 하지만 상상력은 발휘해볼 수 있다. 만약 그 때 정당성 있는 결정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래서 방과를 세자로 책봉했더라면? 모르긴 몰라도 ‘왕자의 난’은 애당초 성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런 명분도 정당성도 없기 때문이다.

난 홍 감독이 이번 월드컵에서 겪은 상황이 조선 초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명분도 정당성도 찾기 힘든 결정 때문에 과도한 비판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따져보자. 한국 축구가 세계 16강에 들어갈만한 수준일까? 현재 리그 활성화 정도나 전반적인 수준을 따져볼 때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하기 힘들다고 본다. (물론 난 축구 전문 기자가 아니다. 따라서 내 평가는 일반적인 축구팬으로서 얘기하는 것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감독 한 사람한테 모든 비난을 쏘아대는 건 너무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굳이 따지자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미묘한 축구계의 구도 역시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다 하더라도 홍 감독 역시 명분과 정당성을 입증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비난은 일정 부분 감수해야 한다. 뛰어난 성적을 냈을 경우 감독에게 돌아갈 찬사를 생각하면 그 정도 비난은 과한 처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과로 정당성 약점 극복한 태종, 한국 축구의 선택은?

이방원은 태종이 되기까지 명분 없는 행동을 두 번이나 했다. 정몽주와 정도전이란 두 충신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명분으로 따지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왕이 된 이방원은 과감했다. 조선 초기 최대 과제였던 ‘사병 혁파’에 성공한다. 자신을 왕으로 옹립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인물들을 대거 숙청했다. 특히 민무구, 민무질 등 외척들을 싹 정리하면서 아들인 세종에게 강력한 왕권 정치의 기반을 물려줬다.

덕분에 태종은 조선의 기틀을 닦은 뛰어난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의 사상적 기초를 다진 것이 정도전이라면, 왕조의 틀을 닦은 것은 태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쯤 되면 실력으로 명분 없는 행동을 극복해버렸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다시 축구 얘기로 돌아가보자. 홍명보 감독이 비난을 받는 것은 결국 ‘성과 부족’ 때문일 것이다. 제 아무리 선수 선발 원칙이 깨졌더라도 한국 축구가 아시아 팀 중 유일하게 16강에 올랐더라면 지금 같은 비판이 나오진 않았을 터이니 말이다. 더 좋은 성적을 올렸더라면 홍 감독은 ‘온갖 비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밀어부친 뚝심의 지도자’란 찬사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

2002년 이후 한국 축구는 꽤 괜찮은 성적을 거뒀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땐 원정 첫승, 2010년 남아공월드컵은 첫 원정 16강 진출이란 성과를 거뒀다.

그렇게 거둔 성과는 ‘명분과 과정’의 중요성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정당성 약한 군주였던 태종이 차근차근 권력의 토대를 닦은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적어도 축구 문외한인 팬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자, 이쯤에서 글을 맺자. 어떤 변명을 들이대더라도 2014 브라질 월드컵은 실패다. 이영표 KBS 해설위원의 말처럼 “월드컵은 경험을 쌓는 무대가 아니라 보여주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의 실패를 내일의 성공으로 바꿀 순 있다.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건 바로 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홍명보란 감독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많은 비난을 쏟아내는 건 장기적으로 큰 도움은 안 될 것 같다.

태종이 그랬던 것처럼 왕조의 토대를 차근차근 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그런 과정이 없는 월드컵 성적은 ‘지속가능한 성과’로 이어지긴 힘들 터이기 때문이다.

/김익현 글로벌리서치센터장 sini@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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