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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현]'응사 열풍'과 낭만주의 시 운동


영문학사에서 19세기 초반은 ‘시의 시대’였다. 워스워드를 비롯해 셸리, 키츠 등 낭만파 3인방’이 혜성같이 등장하면서 바람을 몰고 왔다. 덕분에 ‘그들만의 리그’였던 시가 대중의 눈높이로 내려왔다.

그 시발점은 워스워드가 펴낸 ‘서정담시집(Lyrical Ballads)’이었다. 특히 워스워드가 이 시집 서문을 통해 던진 ‘감정의 자발적 유출(spontaneous overflow of the feeling)’이란 화두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어진 낭만주의 운동의 출사표나 다름 없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시어(詩語)는 '특별'했다. 주변에서 흔히 보는 것들은 시의 소재로 부적합하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러다보니 일반인들이 쉽게 공감하기 힘들었다. 워스워드의 낭만주의 선언은 이런 현실 속에서 나왔다. “시란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표현한 것”이란 주장을 앞세워 그간의 상식에 정면 도전했다. 덕분에 수 많은 보통 사람들이 시와 한층 더 친해질 수 있었다.

지난 주말 tvN의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이하 ‘응사’)를 몰아서 보면서 엉뚱하게도 워스워드 생각을 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감정의 자발적 유출’이란 명제를 떠올렸다.

솔직히 털어놓고 시작하자. 기자 역시 촌X이다. 그래서일까? 극중인물인 삼천포가 신촌 지하철 역 근처에서 헤매는 첫 장면부터 말 그대로 `빵~’ 터졌다. 나도 처음 서울 와선 시청 역 지하도에서 같은 길만 한 시간 반 동안 헤맨 경험이 있다.

여자 친구와 피카디리에 영화 보러 갔다가 바로 앞에 있는 서울극장을 못 찾아 망신 당하는 장면도 그럴 듯했다. 역시 그 무렵 누구나 한번쯤 해 봄직한 경험이다.

많은 사람들이 ‘응사’를 보면서 이런 잔잔한 이야기에 열광한다. 풋풋한 대학 새내기들이 좌충우돌하는 모습에 때론 웃고, 또 때론 감동한다. 내 얘기 같은 내용에 자연스럽게 빠져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드라마 주인공들이 ‘보통 사람’은 아니다. 곰곰 따져보면 하나 같이 ‘엄친아’들이다. 예외 없이 지역 유지 자녀에, 명문대학생이다. 주요 등장 인물 중 한 명인 쓰레기는 이름과 달리 의대 수석을 도맡아 놓고 한다. 칠봉이는 대학야구 최고 스타 중 한 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멀어보이지 않는다. 건강하기 때문이다. 그게 이 드라마가 많은 이들에게 던져주는 감동과 재미의 원천이다.

삼각관계, 출생의 비밀, 불치병에 불륜. 요즘 우리 드라마에 빠지지 않는 흥행 소품들이다. 어느 새 자극적인 스토리 전개가 상식이 돼 버렸다. 그러다 보니 “이 드라마나 저 드라마나 그게 그거 같다”는 불만이 끊이지 않는다. 일부 드라마는 억지 설정 때문에 ‘퇴출 운동’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다시 워스워드 얘기로 돌아가보자. 워스워드가 ‘서정담시집’에서 던진 ‘감정의 자발적 유출’이란 화두는 고담준론을 일삼는 시를 겨냥한 돌직구였다. 그 돌직구는 허공 속에 머물던 시를 현실 속으로 다시 불러오는 신호탄이었다.

‘응사 열풍’이 한국 드라마 시장에 던진 메시지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언뜻 보기엔 밋밋한 듯한 이야기로도 충분히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불륜, 고부갈등, 출생 비밀 같은 장치 없이도 충분히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줬다.

‘응사 열풍’의 시작은 작은 파문이었다. 하지만 그 파문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젠 영상 콘텐츠의 기본 문법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자극적 소재와 쉽게 타협했던 많은 제작자들도 이젠 ‘응사’가 던진 화두를 진지하게 부여잡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김익현 글로벌리서치센터장 sini@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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