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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현]'불났시유' 미담을 바라보는 삐딱한 시각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윈스턴 스미스는 서서히 몰락한다. 급기야 사랑하는 연인 줄리아까지 배신해 버린다. 감시 당하면서 망가진 때문이다.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된 오세아니아에선 일상 생활의 모든 과정이 철저하게 통제된다. 최인훈 식 표현을 빌자면 '광장'만 있을 뿐 '밀실'이 없다.

서두부터 암울한 얘기를 꺼낸 건 최근 엄청난 화제를 모은 음성 파일 얘길 하기 위해서다. 많은 사람들이 듣고 훈훈하게 감동했던 '불났시유'란 파일이다.

파일 내용은 간단하다. 한 서비스센터 직원이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듣는 할머니 고객에게 친절하게 응대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 파일은 최근 사회의 관심을 모은 대기업 임원의 난동, 남양유업 사태 등과 대비되면서 잔잔한 감동을 안겨줬다. 며칠 사이에 SNS를 통해 급속하게 확산됐다.

기자 역시 그 파일을 흥미롭게 들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손님에게 끝까지 친절하게 응대하는 모습은 훈훈하기 그지 없었다. 고객 서비스의 모범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그 파일을 접하는 내내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내밀한 고객 상담 사례가 전 국민에게 공개돼 버린 게 영 찜찜했던 때문이다. 고해성사한 내용이 전 국민에게 공개된 것과 다를 게 뭐가 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최근 발생한 여러 사건의 반작용 때문이긴 할테지만, 개인적으론 저 파일이 미담 사례로 칭송되는 분위기도 못 마땅했다. 더 중요한 이슈는 "내밀한 상담 사례를 적나라하게 담은 파일이 어떻게 유출될 수 있었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해당업체가 '노이즈 마케팅'을 했다고 생각진 않는다. 그 파일을 접한 이후 단 한 번도 그 부분을 의심한 적은 없다. 그 정도 분별력은 충분히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의 쟁점은 해당업체가 노이즈 마케팅을 했느냐는 부분이 아니다. 진짜 중요한 건 고객 상담 전화 내용이 무방비 상태로 전 국민에게 공개될 수도 있다는 '선례'다. '친절 봉사 사례'가 공개됐다면, 또 다른 엽기 사례도 공개되지 말란 보장이 없지 않은가?

서두에 꺼낸 조지 오웰의 '1984년' 얘기로 돌아가보자. 개인의 밀실은 어떤 이유로든 철저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누군가 밀실을 들여다볼 수도 있다는 걱정보다 더 무서운 건 없다. 발가벗겨진 자신의 모습을 무방비 상태로 내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해당 업체 관계자들이 들으면 과한 비유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좀 더 확대해서 생각해보면, 상담 전화 역시 해당 고객에겐 밀실의 영역에 속하는 정보다. 이런 정보가 보호되지 않는다면 어떤 고객이 맘 놓고 자기 얘길 털어놓을 수 있겠는가?

물론 끝까지 친절하게 응대를 한 그 직원은 충분히 칭찬받을 자격이 있다. 기업 이미지를 크게 향상시킨 그 직원에겐 아낌 없는 포상을 해줘도 아깝지 않다.

하지만 그 선에서 머물지 말라고 권고하고 싶다. 이번 기회에 고객 정보 보호 시스템에 문제가 없는 지 진지하게 반성해보길 바란다. 내밀한 정보를 지켜주지 못하는 기업은 고객들의 사랑도 지키지 못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김익현기자 sini@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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