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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현]'대나무 숲'이 갑자기 우는 까닭


우린 굉장히 심하게 화가 날 때 '울화가 치민다'고 한다. 흔히 울화병으로 불리는 이 증상은 화나 스트레스를 풀지 못해 생기는 병이다.

여기서 '울(鬱)'이란 제 뜻대로 하지 못해 갑갑해지는 증상을 말한다. 의견이나 불만이 있어도 제대로 말을 못할 때 생기는 게 바로 '울증'이다. 화(火)는 열이 나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증상이다. 가슴에서 더운 김이 위로 치솟는 증상 역시 '화증'이다. 따라서 울은 원인이요, 화는 증세다.

'화병(火病)'으로도 불리는 울화병은 세계가 인정하는 한국 고유의 질병이다. 미국 정신의학회는 1995년 울화병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고 한다.

"화병(hwa-byung)은 한국 민속 증후군의 하나인 분노 증후군으로 설명되며, 분노 억제 때문에 발생한다."

미국 정신의학회 뿐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도 울화병의 원조는 한국이라고 규정했다.

울화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그 때 그 때 속에 쌓인 불만을 털어놓아야 한다. 계속 억누르다 보면 어느날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적당한 부부싸움은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세상사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약자가 강자에게 속을 털어놓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후환이 두렵기 때문이다. 화병이 한국 고유의 질병으로 불리게 된 것 역시 가부장적인 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요즘 트위터 공간에선 '화병날 위험에 처한' 을(乙)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 옆 대나무 숲'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 9월 12일 트위터에 갑자기 등장한 '@bamboo'(대나무)란 계정이 시발점이 됐다. 이 계정을 이용하면 '~옆 대나무숲'이란 이름으로 비밀 글들을 쏟아낼 수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최초 계정 개설자가 특정 대나무숲을 만든 뒤 비밀 번호를 공개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해당 대나무숲 아이디로 글을 올릴 수 있다.

'트위터'에 등장한 대나무 숲은 순식간에 여러 업종에 영향을 미쳤다. 출판사, 영화제작사, 광고회사, 신문사 등이 시발점이 됐다. 급기야 대표적인 화병 진원지로 꼽히는 '시댁'까지 확대됐다.

'대나무 숲' 놀이의 공통점은 '을'들의 분노를 털어놓는 공간이란 점이다. '출판사 옆 대나무 숲'에 들어가보면 출판사 편집자들의 애환이 가득 녹아들어 있다. '연구실 옆 대나무 숲'엔 고학력 비정규직의 대표 주자인 대학 연구직들의 웃지 못할 황당한 사연들이 담겨 있다. '시댁 역 대나무 숲'에 올라온 사연들은 조금 과장하자면 '눈물 없인' 읽지 못할 정도다.

'대나무 숲' 현상이 급속하게 퍼지는 덴 다 이유가 있다. '갑'과 '을'의 권력 구도가 유난히 뚜렷하게 구분되는 우리 사회의 기본 시스템과 무관하지 않다. '소통'과 '대화' 보다는 '지시'와 '복종'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갑'의 횡포가 만만치 않다는 반증이다. 그런 점에서 대나무 숲은 '을'들의 주체 못할 화병을 달래줄 공간으로 적지 않은 역할을 할 것이다.

일부에선 '대나무 숲' 현상을 'SNS공간에 울려 퍼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외침이라고 해석하는 모양이다. 일리가 있다.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처럼 생겼다는 사실을 안 이발사가, 화병을 치유한 곳이 공교롭게도 대나무 숲이었다.

하지만 대나무 숲이 '을만의 공간'에 머무르는 것은 건강해 보이진 않는다. '연구실 옆 대나무 숲'이 '연구실 안 대나무 숲'으로 바뀔 수 있어야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질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갑들이 좀 더 마음을 열 필요가 있다. 을의 문제 제기를 불평불만으로 치부해버려선 안 된다. 구조적인 문제 제기를 겸허하게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당연히 '뒤끝'도 없어야 한다.

'을' 역시 일방적인 자기 주장만 펼쳐선 곤란하다. 구조적인 문제와 개인적인 잘못을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 옆 대나무 숲'이 '~ 안 대나무 숲'으로 업그레이드 되기 위해선 갑과 을 모두 마음을 좀 더 열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 모든 게 가능하려면 갑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PS/ 다 쓰고 보니 후배 기자들이 '편집국 옆 대나무 숲'을 하나쯤 만들어놨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곳에선 어떤 불만들이 오고 갈까? ^^

/김익현 글로벌리서치센터장 sini@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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