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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권]부패한 한국, 그리스 꼴 날라


그리스 축구 대표팀은 지난 3월4일 월드컵을 대비한 평가전을 치렀다. 월드컵 본선에 나간 그리스는 세계랭킹 11위의 축구 강국. 세네갈은 70~80위권의 약체다. 이날 그리스는 안방에서 0-2로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당시 그리스가 들고 나온 포메이션은 4-4-2.

그리스에서 '4-4-2'는 또 다른 의미로도 쓰인다. 그리스의 세무공무원들 사이에서다. 세금 징수 방식에 '4-4-2 시스템'이 은밀하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사업체가 1천만원의 세금을 내야 한다면, 먼저 400만원을 세무공무원에게 뇌물로 바친다. 그러면 사업체는 200만원의 세금만 내면 된다. 그렇게 해서 나머지 400만원을 탈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에서 '4-4-2'는 과세와 탈세를 둘러싼 '부패방정식'이기도 한 셈이다.

그리스의 사례가 먼 나라의 일일까? 그리스에 광범위하게 퍼진 부패문화를 축약한 말이 '파켈라키(fakelaki)'와 '라우스페티(Rousfeti)'다. 파켈라키는 '작은 봉투'란 뜻으로 '뇌물'을 의미한다. 부탁이나 청탁할 때 대부분 파켈라키가 오간다고 한다. 라우스페티 역시 청탁 등을 할 때 건네는 '대가'를 뜻한다. 뇌물로 건네는 봉투와 청탁의 대가는 우리에게도 참으로 익숙한 말들이다. 그런 관행이 그리스 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광범위하게 잔존하고 있다.

그리스의 사례에서 보듯, 부패는 실제로 나라를 거덜나게 할 정도의 파괴력을 갖고 있다. 반국가적, 반사회적 관행이고 범죄다.

'한국이 설마 그리스처럼 되겠냐'고? 최근 한국 사회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부패 사건들을 보면 결코 안심할 수 없어 보인다. 공공부문의 도덕적 해이는 과거 어느 때보다 심각해보인다. '이러다 그리스 꼴 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특히 최근 큰 이슈로 불거진 부패사건들은 검찰, 경찰, 교육계에서 주로 터져 나오고 있다. 사회의 건강 진단에 보내는 적신호나 다름없다. 이들은 사회의 기강을 바로 잡고, 올바른 가치관 유지의 중심이 돼야 할 곳들이다.

부산·경남 지역에서 벌어진 '검찰 스폰서' 사건에 대해 국민들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고 본다. 다른 지역도 정도 차이만 있을 뿐, '검찰 스폰서' 관행이 만연해 있다는 혐의를 국민들은 두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전 정권에서 일어난 일"이라며 애써 비난의 화살을 돌리려 하고 있지만,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국민들은 별로 없어 보인다. '검찰 스폰서'가 '현재진행형'이라고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다.

자고 일어나면 터져나오는 경찰 관련 사건들은 경찰이 '민중의 지팡이'인지, '민중의 착취자'인지 헷갈리게 한다. 경찰청이 최근 국회에 보고한 범죄 경찰관 관련 자료에 따르면 기소유예 처분 이상만 2007년 261명에서 2008년 286명, 지난해 327명으로 해마다 눈에 띄게 늘고 있다. 내부 징계로 끝낸 사안과 동료 감싸기, 은폐 관행까지 감안하면 실제 발생건수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경찰 범죄중에는 '비위 경찰관'이라고 볼 수 있는 뇌물이나 공문서 관련 범죄에 연루된 지능범이 가장 많아 경찰관들의 부패가 심각한 지경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교육계 부패는 워낙 뿌리가 깊다. 개혁에 대한 교사·교원단체들의 저항도 격심해 백약이 무효일 정도다. '세금보다 무섭다'는 찬조금부터 교사 채용, 인사, 구매, 공사, 방과후 학교, 급식, 교재, 교복, 수학여행, 졸업앨범 등 학교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뇌물 수수가 관행화돼 있다시피 하다. 공공기관 청렴도 조사에서 교육부와 일선 시·도 교육청은 만년 하위권이다. 사사건건 전교조와 대립하는 보수 교단이 전교조에 대놓고 큰소리 치지 못하는 이유는 '부패했기 때문'이라는 처절한 사연도 회자된다. 아이들이 악취나는 환경에서 교육받아서일까.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돈 벌려면 뭘 해야 하나'는 질문에 '편법·탈세'가 1위로 꼽혔다고 한다. 교육계는 어린 학생들이 이런 인식을 갖도록 만든 원인 제공자중 하나일 것이다.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떳떳하게 가르칠 수 없는 너울을 쓰고 있다.

이처럼 높은 수준의 공공성이 유지돼야 할 곳들이 한국에서는 '공공의 적'이 돼 버린 형국이다.

한국 사회의 부패가 위험 수준이라는 것은 지표에서도 나타난다. 국제투명성기구(TI : Tranperancy International)가 지난해 11월17일 발표한 국가부패지수(CPI)에서 한국은 5.5점을 얻어 39위에 올랐다. CPI는 부패가 전혀 없는 상태가 10, 만연한 상태가 0이다. CPI지수가 높을수록 깨끗하고 투명한 사회, 지수가 낮을수록 부패한 사회로 평가받는다.

한국의 CPI는 '선진국클럽'이라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31개국 중 23위에 그쳤다. OECD 회원국중 한국보다 부패지수가 떨어지는 나라는 부패로 악명 높은 이탈리아와 그리스, 폴란드·헝가리·체코·슬로바카아 등 동구권 국가, 멕시코·터키다. 한국은 이들보다 약간 나은 정도다. 한국은 아시아에서는 싱가포르(3위), 홍콩(12위), 일본(17위)은 물론, 대만(37위)보다 CPI가 낮게 나타났다. 한국은 경제규모에서 세계 10위권으로 부상했지만, 부패지수에서는 남보기 부끄러운 수준이다.

전경련이 27일 발표한 설문조사결과에서도 '사회가 부패해 있다'는 국민들의 인식이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경련이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성인남녀 8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사회가 부패해 있다는 답변이 69%에 달했다. 청렴하다고 생각하는 응답자는 23.6%에 불과했다. 이 조사에서 '국민들이 법을 잘 안지킨다'는 답변이 49.3%로 '잘 지킨다'는 답변(47.0%)보다 높게 나타났다.

한국인 10명중 7명이 부패하다고 인식하고 있고, 10명중 5명은 법이 안지켜지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국민이 '떡값이나 뇌물을 줄까 말까' 고민하는 상황, '법을 지킬까 말까' 고민하는 상황에 처할 때 다중의 관행과 현실을 근거로 자신의 비행을 합리화하게 만드는 동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한국인들이 잠재적으로 불법과 비리를 저지를 개연성에 그만큼 많이 노출돼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한국인들은 '반칙'에 관대하고, 반칙을 오히려 '성공의 지름길'로 인식하는 왜곡된 가치관이 갈수록 널리 자리잡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따지고 보면, 부패인식도가 이처럼 높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신호다.

이렇게 된 데에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도층의 잘못이 무엇보다 클 것이다. 대통령은 법을 무시하면서 세종시계획을 수정하려고 한다. 법원이 유죄를 선고한 재벌 회장을 정부는 사면해준다. 현직 국회의원은 불법인 줄 알면서 전교조 명단 공개를 강행한다. 지도층은 이처럼 법 무시에 앞장 서는 행태를 곧잘 보여준다.

그같은 행태는 국민들의 법 감정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많은 국민들이 '법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라는 국가사회 유지의 제1원리를 가볍게 여긴다. 정부는 일부 노조와 시민단체의 불법 파업·시위를 비난하지만, 국민들은 법질서를 가장 안지키는 곳으로 국회·정치권(44.2%), 검찰·경찰·사법부(12.7%)를 꼽고 있다(전경련 조사). 국민들의 인식 속에 법치국가로서 대한민국은 '실종' 상태인 것이다. 오죽 했으면 이용훈 대법원장이 지난 23일 제 47회 법의 날 기념식에서 "국가기관부터 솔선해서 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이례적으로 강조했을 정도다.

'소득이 높은 나라가 투명한 것이 아니라 투명한 나라가 소득이 높다'는 말이 있다. 이는 추상적인 경구로 끝나는 말이 아니다. 사회가 투명해질수록 개인과 사회는 불필요한 비용을 줄일 수 있고, 사회 각 부문은 효율성을 크게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가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사례다. 그리스의 국가부패지수는 2008년 57위에서 2009년에는 71위로 무려 14계단이나 솟구쳤다. 그리스는 '나라가 부패하면 망한다'는 교훈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경우다.

명실 공히 '선진국'을 꿈꾸는 한국이다. 그러나 한국은 벌써 10년 이상 국민소득 2만달러 장벽의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을 뿐이다. 정부는 신성장동력을 찾는다고 혈안이다. 기업들은 기술혁신과 시장 개척에 매진해 왔다. 하지만 '마의 장벽'을 좀처럼 넘지 못하고 있다. 뭔가 커다란 밧줄이 한국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느낌이다. 경제 차원의 접근법만으로는 한계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이 쯤 해서 '청렴국가'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선, 잘 먹고 잘 살아도 '부패한 문화후진국'이라는 오명과 사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나아가서 국민과 기업, 공공 부문에 만연한 불법과 반칙에 드는 천문학적 비용을 줄여 생산적으로 쓰이도록 물꼬를 트는 것이 어쩌면 한국이 풀지 못한 오랜 숙제의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

/이재권 논설실장 jaylee@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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