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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선의 인터넷 김밥]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시뮬레이션 귀환


얼마 전 꽤 오랜만에 음반매장에 들렀다. 개인적으로 고전음악을 꽤 좋아하기에 예전에는 음반매장 출입이 빈번했는데, 언제부터인지 음반을 새로 산 기억이 없다. 다소 설렌 기분으로 매장을 둘러보는데, 미리 음반을 들어 볼 수 있도록 배려해 둔 시청코너에 익숙한 피아니스트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클래식 팬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캐나다 출신 천재 피아니스트였던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었다. 이 음반은 나도 이미 갖고 있는 것이기에 반가운 마음이 들어 CD를 집어 드는 순간 낮 선 단어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젠프 리마스터링",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지? 1955년 음반을 다시 마스터링 하다니? 음질을 개선해서 다시 선보였단 뜻인가? '젠프'는 또 무슨 말이야?

궁금증이 꼬리를 물어 CD 앞 뒷면을 부지런히 살폈다. 내용인즉 과거 굴드의 연주를 컴퓨터가 흉내 내어 연주한 음반이었다. 미국의 젠프 스튜디오가 굴드의 1955년 연주 녹음을 디지털 신호로 분석하여, 건반의 두드림과 터치, 음량, 페달의 깊이 등과 같은 정보를 저장 한 뒤,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입력된 신호대로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시켜 녹음했다고 한다. 녹음하는 장소 역시 1955년 당시와 유사한 환경을 조성하여 당시의 현장감까지 재현했다고 덧붙였다.

이 음반이 발매되고 나서 과연 이 연주가 굴드의 연주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적지 않는 논란이 있었다. 물론 기초가 된 데이터는 굴드의 연주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굴드의 연주를 컴퓨터가 그대로 모사하여 녹음된 경우이기 때문이다. 과연 두 개의 연주를 한 사람이 한 것으로 볼 수 있을까? 디지털 기술로 인해 형이상학적인 동일성의 논란이 전면에 등장하는 전주곡으로 보인다.

동일성의 논란에 대해 흔히 이용하는 '테세우스의 배' 이야기가 있다. 예를 들어 100개의 조각으로 만들어진 배가 있다고 치자. 시간이 지나서 한 조각씩 보수를 해 나갔는데, 시간이 흘러 100조각 모두가 바뀌었을 때 과연 이 배를 처음 그 배와 같다고 할 수 있을까? 나아가, 100개의 조각을 한 조각씩 떼어내어 복사하여 100조각을 모두 맞추어 배를 만들었다면 이 배 역시 처음의 배와 동일한가 그렇지 않은가?

디지털 기술을 이용하여 컴퓨터가 모사, 연주한 음반 역시 위의 논리와 유사한 딜레마를 안겨준다. 지금까지의 디지털 기술로는 바이올린과 같은 현악기의 신호를 디지털로 분리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이야 시간이 갈수록 발전하고 더욱 정교해져 마침내 인간의 청각으로는 구분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디지털 신호로 저장하는 일이 가능해진다면, 거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동일성의 문제가 부각될 것임은 불 보듯 뻔하다.

SF영화에서 보면, 종종 죽은 사람을 홀로그램으로 불러내어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죽은 사람의 과거 기록데이터를 바탕으로 재현하여 현실세계에서 형상화하는 장면인데, 굴드의 음반은 이러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지금이야 연주음반 정도가 재현되는 수준이지만, 훗날에 얼마든지 굴드의 생전 연주 모습까지 재현하지 못한다는 법이 없을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음악회에서 과거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의 명 연주를 실감나게 즐기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쯤 되면 이러한 연주가 과거의 피아니스트와 동일한 연주인지에 대한 동일성의 논란은 사라지고 당연한 사실로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엔터테인먼트 문화로 인식되리라.

이상스러운 불멸의 시대, 데이터만 있다면 얼마든지 재현이 가능한 시대로 들어섰다. 디지털 기술로 인한 복제는 동일성의 문제와 정체성의 혼란을 야기시킨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시도는 인간 외적인 비 생명체에 한정되었다. 젠프의 굴드 음반은 단순한 흥미거리를 넘어 인간행동에 대한 시물레이션이 충분히 가능함을 보여주는 단서로 보인다. 이런 식으로 계속 발전한다면 굴드는 불멸 영생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굴드의 애호가들은 이 음반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굴드는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혼잣소리로 허밍을 하는 습관이 있었다. 굴드의 명반을 들어보면 그의 허밍을 자연스레 느낄 수 있다. 굴드의 팬들은 새로운 음반에서 그의 허밍소리가 들리지 않아 그의 연주다운 맛을 느낄 수 없다고 말한다. 음질은 한층 나아졌어도 아날로그가 주는 감성과 영혼의 표현은 되살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디지털 기술은 무의식적으로 극단적 무신론이나 회의주의를 낳는 경향이 있다. 모두들 눈에 보이는 현상과 표현에만 주의를 기울일 뿐 내밀한 영혼의 울림이나 인격의 향기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한다. 앞으로도 모사와 복제는 우리의 감각능력을 초월할 정도로 발전하리라.

그러나 인격과 영혼의 떨림도 복제가 가능할까? 절대적인 진화론 자들은 인간생명의 기원을 “진화”라는 가설로 풀 수 있다고 공언했지만, “인격은 어디서부터 왔는가?” 라는 인간존재의 본질적인 문제 앞에서는 늘 “알 수 없다” 는 불가지론자의 모습을 보여왔다. 보이는 육체와 보이지 않는 인격 성이 하나된, 총체적인 모습이 인간 존재를 나타낸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어느 한 쪽에 치우친 과장과 분리야 말로 정체성의 혼란의 근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기술이 들어선 이래 국가와 사회, 가족 공동체는 물론이고 개개인의 인격까지 찢기고 분리되는 사회적 현상은 왜일까? 물리적으로 더욱 가까워지고 함께 할 수 있는 여건이 풍성해 졌는데 왜 인격과 영혼의 거리는 가까워지기는커녕 멀어지기만 할까? 태생적으로 디지털은 인격과 영혼의 교감까지 연결하기에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테크놀로지이다. 자주 만나야 인격의 소통을 맛볼 수 있고 살아있는 음악가의 연주회장에 가야 그의 음악적 영혼을 호흡 할 수 있다.

젠프의 굴드 음반은 디지털 기술발전의 미래상과 상당한 흥미거리를 제공한 점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디지털 기술이 가진 태생적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주기도 했다. 그래서 디지털 기술의 한계가 한편으로 매우 반갑고, 아울러 인간의 지적 능력이 지닌 유한함이 감사하기까지 하다.

/홍윤선 웹스테이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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