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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복] 시어머니 시누이들과 살아가기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온 친구 녀석이 캐나다로 도망치듯 유학을 떠난 것은 작년의 일입니다. MBA 과정을 밟겠다며 짐을 쌌다지만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더군요.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도망치듯 떠난 유학’이라고 칭하는 것 뿐입니다. 유학을 간다는 놈이 어떤 MBA를 할지 생각도 안 해보았다는 것이 그런 의심을 더욱 굳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 친구는 사회 생활을 하면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스트레스의 내용이 우리가 흔히 느끼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직장 상사와의 불화나 동료와의 트러블이 주내용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내게서 관심을 끊어주었으면’ 하는 것이 그 친구의 바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핍박이 되었던 셈이지요.

그 부부는 결혼한 지 14년이 넘었는데 아직 아이를 갖지 않았습니다. 아니, 갖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습니다. 물어본 적도 없습니다. 다만 만나는 사람마다 “애는 잘 크느냐”고 던진 질문이 그들에게는 아픔이었을 것 같습니다. “애가 없다”고 하면 “왜 낳지 않느냐”, “무슨 문제가 있느냐”, “내가 잘 아는 한의원이 있는데 소개시켜 주겠다” 등의 관심이 이어집니다. 주변 사람들의 이런 관심이 그들에게는 명치 끝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느낌을 줄 것입니다. 애정어린 관심도 한 두 번입니다.

우리는 항상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삶에 관여하는 것을 은근히 즐깁니다. 다양한 화제 거리가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잘 되느냐”고 반드시 물어봅니다. 벼랑 끝에 몰린 그 사람의 속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매일처럼 그런 질문을 받는 사람으로서는 짜증이 납니다. 결혼 한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필수 코스인 양, 2세 계획을 물어 봅니다. 당사자가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이라면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도 한 두 번입니다. 어느덧 지치게 됩니다.

남도 나와 같아야 한다는 사고가 우리 뇌리 깊숙한 곳에 깔려 있습니다. 나와 다른 남을 보면 안쓰럽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합니다. 애꾸눈 마을에 가면 정상이 비정상이라는 말이 있지요. 우리가 애꾸눈인지, 아니면 남과 다른 그들이 애꾸눈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뿐인데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남을 자기 기준에 맞추어 해석하려는 시도가 때로는 상대방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준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참견을 하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인생에 훈수를 두려고 합니다.

후배가 창업을 한다고 해서 장도를 축하하기 위한 저녁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온 선배들과 후배의 대화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선배1: “우리 도움 받을 생각 말고 네 힘으로 해라 응?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 굳이 한다고 하니까 일단 축하는 한다만 이제부터는 죽어도 네 책임이다. 죽어도 너 혼자 죽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후배: “당연하지요. 자신 있으니까 회사 차린다는 거 아닙니까?”

선배2: “자본금 모을 때 웬만하면 모두 네 돈으로 해라. 남의 돈 받을 생각 말고. 그게 다 너한테는 부담이다.”

후배: “왜요? 자본금 규모가 크면 유리한 것 아닙니까? 펀딩도 받으면 좋잖아요.”

선배2: “자식. 개뿔도 모르는구먼. 남의 돈 갖다가 자본금으로 밀어 넣으면 그게 네 돈인줄 아냐? 알고 보면 부채도 그런 부채가 없어요. 시어머니 시누이가 떼거리로 생기는데 뭐가 좋냐. 이 녀석아.”

후배: “주주들이 왜 시어머니 시누인가요? 다들 도와주겠다고 하는데요.”

선배3: “자기 돈 넣어두고 까맣게 잊을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냐? 아마 3개월을 못 버틸거야. 참을성이 없거든. 금방 달려와서 이래라 저래라 참견할거다. 그러다가 안되면 아마도 네 모가지 자르려고 들걸.”

후배: “그 사람들이 이 사업을 얼마나 알아서요? 우리 팀이 아니면 국내에 이 분야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니까요. 어떻게 참견을 하겠어요.”

선배2: “못된 시어머니 시누이가 며느리 속을 다 알아서 그러냐? 그래도 경륜이란 게 있어서 참견하는 데는 선수들이야. 그런 식으로 나이브한 생각 가졌다가는 이 동네에서 살아 남기 힘들 거다. 일단 자력으로 승부해서 실력을 보여준 다음에 남의 돈을 받아야지 안 그랬다가는 험한 꼴 본다.”

선배1: “제일 조심해야 될 것이 훈수꾼들이야. 이렇게 참견하고 저렇게 거들다가 잘못되면 책임은 안 지는 게 훈수꾼들이지. 훈수꾼은 구경꾼이야. 네 사업을 그 사람들이 해줄 것도 아닌데 목소리만 크다니까. 잘 되면 네 덕이고 못되어도 네 탓이다. 앞으로 반년간 우리 볼 생각 말고 해보고 그 다음에 얘기하자. 손 벌리려고 찾아오면 죽을 줄 알아.”

모인 선배는 5명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선배 중 2명은 사업에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내 이익이 걸린 것이 아니라면 남의 일에 참견도 안 하고 훈수도 받지 않겠다”는 주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배2 라는 분의 경우 주주들 등쌀에 시달리다가 대표에서 물러나 한동안 아내의 약국에서 셔터맨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조그만 오퍼상을 차려서 이제 겨우 먹고 살만하다고 합니다. 이 양반들의 얘기를 듣다 보니까 웃음이 나오더군요. 후배에게 ‘훈수 방지법에 대한 훈수’를 두는 모양새였으니 말입니다.

저는 대부분의 참견은 선의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남의 생이지만 오죽 답답하면 참견을 해서 방향을 바꾸라고 종용을 할까요. 구경하기가 거북할 정도여서 시누이 노릇을 하려 들 수도 있습니다. 남의 사업에 나쁜 뜻을 가지고 밤놔라 대추놔라 하는 사람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다만 참견이라는 것이 천편일률적이라서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지겹기도 합니다.

독신주의자는 수 천번 이상 ‘언제 결혼 하느냐’는 질문을 받아야 합니다. 그 때마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 자신이 미울 지경입니다. 결혼한 사람은 신혼 여행에서 돌아온 날부터 ‘언제 애를 낳느냐’는 질문 공세에 시달립니다. 아이를 낳으면 ‘애 잘 크느냐’, 애가 조금 크면 ‘공부는 잘 하느냐’, 장성하면 ‘언제 결혼 시키느냐’, 손주를 보면 ‘손주가 잘 크느냐’는 질문 속에서 살아갑니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에게 이는 반가운 안부 인사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설계가 다른 사람에게는 참견의 시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업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사업이 잘 되느냐’에서 시작된 문안 인사는 어느덧 참견으로 이어지고, 마침내는 그 분야에서 힘이 있다는 사돈의 팔촌까지 동원되어 “잘 얘기해서 도와주도록 하겠다”는 방향으로 치닫습니다. 이러다 보면 시어머니 또는 시누이가 한 명 생깁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남의 지원을 받으려면 차라리 처음부터 그 대가를 지불하기로 계약을 맺는 것이 깨끗합니다. 하지만 시어머니나 시누이들과는 이런 계약을 맺기 어려우니 문제입니다. 설혹 계약을 한다고 해도 항상 뒷탈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들로서는 항상 자신의 공에 비해 대가가 적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세상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살아갈 수 없는 이상, 어울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잠시라도 관심과 참견에서 벗어나 고독을 즐기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작은 소망일 수도 있습니다. 천편일률적인 관심과 참견이 주는 스트레스에서만 벗어나도 인생의 즐거움을 더욱 만끽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꽤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외로운 생활을 해보지 못한 투정일 수도 있습니다.

과도한 관심과 참견에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시어머니-시누이 노릇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우리 사회가 그럴 뿐입니다. 견디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다만, 누구에게 도움을 주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 전에 ‘저 사람의 입장이 무엇이고 내가 어떻게 얘기를 전해야 서로에게 좋을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여유가 있었으면 합니다. 참견을 당하는 사람 역시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울려 살아가는 것은 우리들의 숙명입니다.

한상복(㈜비즈하이 파트너, 전 서울경제신문 기자 closest@bizhig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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