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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복] 명품 만드는 벤처를 기다리며


 

요즘 신문을 보면 흔히 접할 수 있는 키워드 중의 하나가 ‘명품’입니다. 명품에 중독된 일부 여대생들이 신용카드를 마구 긁어 대다가 신세를 망쳤다는 소식에서부터 명품 한 두개 정도 갖고 있지 않으면 ‘왕따’ 신세라는 등 수많은 사연이 있습니다. 어떤 신문은 명품 브랜드 소개 코너까지 마련했더군요. 대중을 겨냥한 신문이 별도의 코너를 운영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 정보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장이 크다는 얘기지요.

갑자기 명품 얘기를 꺼낸 것은 제가 잘 아는 어떤 분의 메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분의 경험담을 읽다가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어서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잘 지내시죠? 온 세상이 축구에 홀딱 빠져 있는데요. 한 선생님은 독야청청 벤처 이야기만 줄창하고 계시는군요. 히딩크 감독에게서 배우는 경영학… 이런 것도 한번 써보실 생각은 없는지요. 시류에 잘 편승해야 좋은 칼럼니스트 아니겠습니까? 그래선지 요새 한 선생님 글이 재미가 없어요. 크크 농담입니다.

각설하고…제가 며칠 전 좀 특이한 경험을 했어요.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한 선생님께 메일 보낸지도 오래되고 해서 겸사겸사 그 일이나 들려드릴까 합니다.

이사를 가려고(다음주 일요일날 상계동으로 갑니다)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 보니까 계륵이 하나 나오더군요. 계륵이란… 만년필입니다. 20년 정도 된 것 같아요. 제가 중학교 때 선친이 전교 수석(저 공부 잘했습니다. 지금은 이 모양이지만. ㅋㅋ) 선물로 사주신 만년필입니다.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닌데요. 그 당시에는 촉이 닳을까봐 함부로 쓰지도 못하고 정성껏 다루었던 기억이 납니다.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도 나고 해서, “짐 빨리 싸라”는 마누라 잔소리를 무시하고 잉크를 넣어 보았습니다. 근데 역시나. 써지지 않더군요. 잉크가 안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막힌 모양입니다. 펜촉도 많이 망가진 것 같고요. 그래서 버리려고 했는데 어째 찜찜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님이 뒤에서 보고 계신 것 같은 기분이 들더군요.

혹시 똑 같은 것이 있나 해서 인터넷을 뒤져 보다가 놀랐습니다. 그 제품이 여전히 나오고 있었습니다. 값도 5만원인가 밖에 하지 않습니다. 이거야 말로 놀랄 일 아니겠습니까? 20년이 지났는데도 그 모델 그 대로 생산이 되고 있다니. 아버님 세대도 쓰던 것이라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이게 도대체 몇 년 동안 나오고 있는 건지. 황당했습니다.

국내 수입원이 어딘가 찾아봤는데요. 웹 사이트에 A/S코너를 운영하고 있더군요. 게시판에 제 사정과 어떻게 고칠 수 있느냐고 글을 올렸습니다. 당연히 별로 기대는 없었지요. 5만원 밖에 안 하는데 차라리 새로 사는 편이 낫겠지요.

그리고 다음날 혹시나 해서 그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또 놀랐습니다. 운영자가 성실하게 응대를 해주면서 만년필을 우편으로 보내달라고 하더군요. 세척을 하면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다나요. 펜촉은 못쓰게 생겼으면 갈아주겠는데 1만원이랍니다. 만년필을 잘 포장해서 우편으로 보냈습니다. 오랜 세월 굴러다니느라고 흠도 많이 났지만 만년필이 갑자기 사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다시 돌아오면 중요한 업무를 결재할 때만 조심스럽게 쓸 작정입니다. 아버님의 유산이니까요.

이래서 만년필(만년을 쓴다고)이고, 이래서 명품인가 봅니다. 꼭 비싸다고 해서 명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우리 주변에는 참 명품이 많습니다. 제가 십 수 년간 잘 쓰고 있는 스위스 칼(일명 맥가이버 칼)이나 기름 넣는 라이터, 썬 글라스, 아버님에게 물려받았으나 여전히 잘 찍히는 낡은 기계식 카메라, 할머니와 어머니에 이어 제 아내가 쓰고 있는 전기 다리미… 이런 게 다 명품입니다. 고장 한번 없이 잘 쓰고 설혹 고장이 나도 쉽게 고칠 수 있는 이런 물건이 명품이 아니라면 뭐가 명품일까요.

조그만 기업을 꾸려가는 경영자의 한 사람으로서 소중한 뭔가를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나도 명품을 만드는 기업의 경영자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곁에 오래 머물면서 그들과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친근한 벗’ 같은 제품을 만들어야 겠다는 각오를 다져 봅니다. 한 선생님도 글을 많이 쓰시는 분인데, 이런 명품 만년필 한번 써보시지요. 제가 사드리겠습니다. 점심 한끼 내시면요.^^ 그럼 가까운 시일 안에 뵙겠습니다. 건필하십시오.>

이 분의 명품에 대한 정의가 아주 간단 명료해서 재미있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희소가치가 높고 값 비싼 명품도 많겠지만, 나에게 오랫동안 함께 하면서 작은 기쁨을 준다면 그것이 바로 명품일 것 같습니다.

명품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제품의 품질 일 것입니다. 막 다루어도 결코 고장이 나지 않는 견고성과 안정성, 거기에 싫증이 나지 않을만한 디자인까지 갖추었다면 금상첨화겠지요. 오랜 세월을 그 주인과 함께 해야 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명품은 단지 물건을 잘 만든 것만으로 받을 수 있는 찬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제품도 제품이지만 고집스러운 장인정신과 거기에서 비롯된 혼이 느껴지는 서비스가 어우러져 비로소 명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자고 일어나면 기술이 바뀌어 있는 정보기술 계통에서 이런 기준의 명품을 만든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시각각으로 기술이 바뀌고 어제의 제품은 효율을 깎아 먹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리는데 무슨 구닥다리 명품이냐”는 얘기도 나올만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명품은 명품이라는 말이 여전한 진리일 것 같습니다. 물품이 아닌 인터넷 서비스든, 솔루션이든 고객의 까다로운 욕구를 잘 반영해 성실한 업그레이드로 만족을 안겨준다면 그것이 바로 명품일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경쟁사가 쫓아올 수 없는 강력한 브랜드 가치를 형성하게 되겠지요.

J사장님이 기필코 명품을 만들고 그것을 바탕으로 성공했으면 합니다. 여러분의 회사도 명품 회사로 이름을 날리기를 빕니다.

한상복 (㈜비즈하이 파트너, 전 서울경제신문 기자 closest@bizhig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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