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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복] 그 많던 ‘터프 가이’는 어디로 갔을까?


 

2000년 초니까, 꽤 오래 전의 일입니다. 벤처 열풍이 우리나라에 들불처럼 번질 때였습니다. ‘벤처기업을 한다’ 하면 주변 사람들의 경탄과 부러움을 사던 시절이었습니다. 요즘 상황에 비춰보면 격세지감이란 말이 어울릴 듯 합니다.

재미교포 벤처사업가인 A사장은 고국 땅을 밟았다가 황당한 일을 당했습니다. 다국적 정보기술업체에서 오랜 기간 일을 하다가 창업한 A사장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꽤 알려진 사업가입니다.

일에 쫓겨 다니느라 한국 방문을 엄두도 못 내고 있다가 실리콘밸리에 연수를 왔던 자칭 ‘제자’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해 귀국을 결정했습니다. “잘 아는 벤처기업이 있는데 한 수만 지도해달라”며 애원을 하는 바람에 서울 구경도 할 겸 해서 시간을 냈답니다.

그 당시 신문(위성 전송기술의 발달로 인해 미국 서부의 교포들은 우리나라 독자들보다 한국신문을 몇 시간 일찍 받아봅니다)을 통해서만 접했던 한국의 벤처산업을 직접 둘러볼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렜다고 합니다.

방문할 벤처기업의 업종 특성을 고려해 자신의 경험과 미국내 산업현황 등을 담은 프리젠테이션 자료까지 손수 준비했습니다. 만남을 주선한 제자의 체면도 그렇지만, 고국의 기업에 작으나마 보탬을 주고 싶다는 의도에서 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A사장의 순수한 마음은 그 회사의 회의실에 들어서는 순간 짓밟히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직원들의 얼굴에서 호감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잡상인이 물건 파는 자리에 억지로 앉아 있어야 하나’는 표정들이었습니다.

A사장은 그래도 내색을 하지 않고 진지하게 준비해온 내용을 브리핑했는데 직원들의 행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관이었습니다. 이럴 때는 핸드폰을 꺼두는 것이 예의일 텐데 여기저기서 벨 소리가 울렸고, 몇몇 직원은 나가지도 않고 통화를 하는 등 볼썽사나운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부 직원들은 모 외국계 대기업이 주최하는 행사에 가봐야 한다며 중도에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프리젠테이션이 끝난 뒤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했더니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직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그 회사 사장이 정중히 사과를 했답니다. “우리 애들이 조금 건방지게 보였는지 모르겠는데, 어려서 그렇다고 이해해 달라”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 회사 직원들은 전부 엉터리다. 어깨에 힘만 들어간 애송이들이다. 펀딩을 잘 받아서 자본금이 많을지는 몰라도 원래 잔칫집에는 파리가 꼬이는 법이다. 돈 떨어지면 모두 제 살길 찾아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A사장을 초청했던 ‘제자’는 뒤늦게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 이렇게 악담을 했습니다.

A사장의 발표 내용이 별로 영양가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바쁜 직원들로서는 강연을 들을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어달 뒤에 그 회사 사장과 간부진이 미국을 방문해 A사장에게 재차 사과를 하고, 지속적인 도움을 받은 것을 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A사장의 역량을 뒤늦게 깨달았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쨌거나 A사장은 실리콘밸리 죽음의 질주에서도 번듯하게 살아 남아 여전히 사업의 틀을 다지고 있습니다. 반면 A사장이 강연을 했던 그 회사 멤버들에는 변화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면면이 달라졌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마치 괴기소설의 한 장면처럼 사람들이 일제히 바뀐 것입니다.

당시 그 회사 직원들을 보면 ‘터프 가이’가 유독 많았습니다. 저도 몇 번 들른 적이 있는데, 그 때마다 다툼을 보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브로셔 제작을 위해 방문 상담을 하던 한 협력사 여성이 울며 뛰어 나가는 것 쯤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이벤트 대행사 직원과 멱살잡이가 벌어진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 쯤 되면 ‘상당히 전투적인 터프 가이들(연예계에서 지칭하는 것과 다를지는 모르지만)’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들로서는 협력사의 일 하는 모양새가 성에 차지 않아서 조금 더 완벽한 것을 요구하다 보니 마찰이 빚어졌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을 당하는 사람들은 “저 녀석들이 XXXX 출신이라고 어깨에 힘을 주는데 눈꼴 셔서 못 봐주겠다”고 어금니를 깨물기도 합니다.

터프 가이가 많으면 힘이 될 때도 있습니다만 분란도 자주 일어납니다. 일단의 터프한 직원들이 다른 직원들과 심하게 다투는 통에 경영진이 화해를 시키느라 애를 쓰거나, 제휴사를 마치 하청업체처럼 다루다가 관계가 회복불능 상태에 빠진 케이스도 있습니다. 물론 몇몇 터프 가이들은 인생을 새 출발한다는 각오로 변신을 서두르기도 했지만, 당시로서는 어깨에서 힘을 빼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업간 관계에서 항상 ‘갑’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하 루아침에 ‘을’ 내지는 ‘평등관계’로 의식을 바꾸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스템이 잘 정비된 곳에서 손가락 하나로 수많은 ‘을’을 지휘하면서 일을 하던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웬만한 잡일조차 모두 스스로 처리해야 하는 환경을 접하게 되면 짜증이 날 수 밖에 없고, 이럴 때마다 과거에 대한 집착이 다시 살아나 불화요인을 만들기도 합니다.

헌데 그런 터프 가이들을 요즘 들어 찾아 보기 어려워졌습니다. A사장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그 회사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일부 터프 가이의 경우, 끝내 적응을 하지 못하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체질을 바꿔 주먹에서 힘을 빼는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 많던 터프 가이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저는 이것이 바로 ‘환경의 위력’이라고 느낍니다. 환경이 동물의 본능을 결정짓는 것처럼 벤처라는 척박한 토양은 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무던하고도 질긴 사람 만을 선별하고 나머지는 도태시킵니다. 더구나 자금난은 2년 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좋아질 것’이라는 말과 기대는 무성하지만 호전의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직장으로서의 대기업이 ‘아스팔트’라면 벤처기업은 ‘늪지대’로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아스팔트에서는 스포츠카를 타고 신나게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늪지대에서 그런 속도를 바랄 수 있을까요. 어쩌면 벤처는 우리가 상상하는 늪지대보다 더욱 험난한 곳인지도 모릅니다.

늪지대에 접어들었으면서도 스포츠카를 버리거나 개조할 생각을 하지 못한 일부 사람들이 결국에는 아스팔트가 곱게 깔린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도 이런 위험에 기가 질려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포츠 카를 버리고 뗏목의 노를 저어 힘겹게 늪을 헤쳐가는 여러분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어떤 자기계발 지침서를 보니 남에게 터프한 사람보다는 스스로에게 터프한 사람이 성공 가능성을 더욱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한상복(㈜비즈하이 파트너, 전 서울경제신문 기자 closest@bizhig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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