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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균의 폰꽁트] 어허~공이나 사람이나 잘보고 차야지~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축구에 별로 관심이 없었어. 내가 아는 축구선수는 차범근 아저씨와 펠레 정도였고 축구경기란 그저 상대방의 그물망(?)에 공을 차 넣으면 1점을 얻는구나 하는 정도의 극히 초보적인 상식수준을 넘지 못했어. 우리나라의 대표팀을 맡고 있는 감독이 외국인이라는 것만 알았지 그가 네덜란드 출신의 명장 거스 히딩크라는 것도 몰랐었어.

우리 대표팀이 월드컵 시작 전에 외국팀과 평가전을 치렀잖아. 아버지와 남동생이 평가전을 본다고 TV앞에 앉아있어도 “평가전이고 비싼 돈 들여가면서 하는 건데 우리나라한테 적당히 비겨주는 경기가 뭐가 재미있어요?” 하며 아주 싸가지 없는 말도 서슴지 않고 했었지.

그런데 하도 심심하고 별로 할 일도 없어서 곁다리로 평가전을 지켜보다가 생각이 싹 바뀐 거야. 아, 우리나라 선수들이 저렇게 축구를 잘 했던가 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는 거야.

매일 우리나라 축구는 문전처리가 미숙하다거나 경기에 지면 잔디구장이 절대 부족해서 실전에서 깨지는 거라는 둥의 평가만 들었던 기억이 나는데 평가전은 나의 그런 고정관념을 일순간에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거지.

현란한 발놀림과 악착같은 수비진들의 몸싸움, 헤딩으로 골을 넣는 강력하고 정교한 기술이 눈에 들어오더라고.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되고 가슴이 마구 뛰면서 “이겨라, 이겨라” 하는 응원이 튀어나오는 거야. 그리고는 아주 푹 빠져들게 된 거지.

내가 축구경기에 빠져들게 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어. 평가전에서 유독 한 선수가 내 눈에 쏘옥, 말 그대로 쏘옥 들어온 거야. 귀염성 있는 얼굴에 빠른 몸놀림이 먼저 눈에 띄었고 승부욕으로 반짝거리는 총명한 눈빛에 필이 확 꽂히는 느낌이었어.

경기가 끝난 후 만족스럽게 미소짓는 그 얼굴, 눈빛이 왠지 나를 향하고 있다는, 아무 근거도 없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강한 끌림이 나를 사로잡았어.

그런데 그 다음날 그와 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에 묶여 있다는 걸 다시금 확인하게 됐지. 친하게 지내는 친구와 만나서 그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마자 친구가 반색을 하는 거야.

“어머, 나 그 사람 알아. 얼마 전에 우리 매장에 와서 휴대폰 샀거든.”

“정말이야? 얘, 나 그 사람 휴대폰 번호 좀 알려주라.”

“안돼. 휴대폰 번호 노출 시키는 거 법에 걸리는 일이야. 간신히 백화점 아르바이트 잡은 건데 놓치면 안 된단 말이야. 절대 못 가르쳐줘.”

안된다고 고집을 피우는 친구를 아부와 읍소와 뇌물로 3일 동안 들들 볶고 나서야 간신히 그의 휴대폰 번호를 손에 넣을 수 있었어. 친구가 간첩 접선 하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경계를 하다가 그의 휴대폰 번호가 적힌 쪽지를 건네주는 순간 내손이 불타는 것만 같았어.

그 후로 나는 그의 열렬한 팬이 됐고 축구에 광분하게 됐지. 폴란드와 첫 경기를 치르던 날, 시청 앞으로 달려가 목이 터져나가도록 거리응원을 했고, 대형 전광판에 그이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순간 나는 결심했지.

‘그래, 넌 내거야. 난 알아. 우리는 필연적으로 연결된 사이야. 전생에 아름다운 연인이었을 거야. 난 알 수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순식간에 널 알아보고 느낄 수 있겠니.’

난 현명한 여자야. 지혜로운 여자지. 이미 수많은 여자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고 열광하기 시작한 마당에 내가 그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좀더 색다르게, 좀더 과감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나는 다른 여자들보다 좀더 유리한 고지에 서 있잖아, 바로 그의 휴대폰 번호를 알고 있으니 말이야.

난 신비주의 작전을 펼치기로 했어. 치기어린 10대 소녀처럼 그의 이름과 사진이 든 플래카드를 들고 경기장이며 숙소 앞에서 ‘오빠’를 연호하는 팬클럽의 일원이 될 수는 없는 거 아니야.

나는 똑똑하고 현명한 여자이기 때문에 그의 장래에까지 염두에 둬야 하는 거야. 그는 분명히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세계무대에 올라설 것이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의 연봉을 받는 스타플레이어가 될 건 당연한 일이지.

유명한 운동선수들을 봐봐, 그들의 아내나 연인들은 모두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미모를 가졌잖아. 객관적으로 봐도 나는 미모에 몸매에 거기다 평소 갈고 닦은 영어회화 실력까지 두루 겸비하고 있으니 장차 세계적인 축구선수가 될 그의 야무진 내조자로 딱 어울리는 짝이지.

나는 그의 휴대폰에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어. 내가 누구일까 하는 호기심을 그에게 유발시키면서 월드컵 기간 동안 경기에 몰두해야 하는 그의 상황을 십분 고려한 치밀한 작전이었어.

'처음 TV에서 당신을 보자마자 반했어요. 당신이 지금 얼마나 월드컵에 열중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첫 승리를 축하합니다. 저도 거리에서 응원했어요.'

'당신이 느끼고 있을 승리의 충만함을 저도 느끼고 있답니다.'

매일 이런 식으로 하나씩 문자 메시지를 보냈어. 또 그가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들으라고 음악을 보내기도 했지. 그가 나를 강하게 의식하고 남다르게 느끼도록 곡 선택에도 신중을 기했어. 최신 유행가요가 아니라 60년대의 트로트나 이박사 버전의 관광버스용 메들리로 말이야. 그가 들으면서 ‘어, 재미있는 여자네’ 하는 웃음을 유발시키고자 하는 절묘한 작전이었지.

당장 그와 통화하고 내 아름다운 음성을 들려주고 싶은걸 꾹 참았어. 아직은 아니거든, 자칫 잘못하면 가볍고 헤픈 여자로 보일 수도 있으니까 조금 더 안타깝게 만들고 내가 지적이고 현명한 여자로 처신해야 했지.

'전 아직 응원을 해야합니다. 우린 월드컵이 끝나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지금 당신에겐 월드컵이 가장 중요한 일이잖아요. '

바로 이거야. 내가 목적한대로 그는 나를 남다르게 생각하게 되겠지. 나는 벅차오르는 흥분을 월드컵이 열리는 기간 내내 거리응원에 몰두하면서 지그시 눌렀어. 우리나라 경기가 있을 때마다 나는 거리로 뛰어나갔어. 이미 붉은색 티셔츠만으로는 성에 안 차는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태극기로 원피스를 만들어 입고 과감한 노출패션을 연출하는 격정으로 벅찬 마음을 다스려야 했지.

그리고 드디어, 월드컵이 끝나고 그와 만나자고 했어. 조용하고 격조 있는 장소를 선정하고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었지. 물론 신비주의 작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때까지도 모든 약속은 휴대폰을 통한 문자 메시지만으로 했어.

그에게 알려준 대로 나는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약속장소로 향했어. 내가 어떻게 생겼을까? 온갖 상상을 하며 나올 그에게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섹시하면서도 청순미를 갖춘 내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거지.

약속장소에 도착해서 실내를 둘러보니까 그는 아직 오지 않았어. 나는 조명발이 확실한 테이블을 골라 앉았어. 언제 그가 올지 모르니까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잔뜩 긴장을 하고서 말이야. 초조함에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막 컵을 들 때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어.

“제가 좀 늦었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리다가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어. 그는 보이지 않고 어떤 늙수그레한 중년 아저씨가 느끼하게 웃고 있잖아.

“빨간색이 정말 잘 어울리네요.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젊긴 하지만 미인이십니다.”

“저… 저는… 000 선수를…”

“내가 그놈 애비요. 아가씨가 보낸 문자 메시지를 보여줬더니 우리 아들놈이 지가 사준 휴대폰 덕분에 아버지가 홀아비 신세 면하게 됐다고 오늘 데이트 비용을 넉넉히 줍디다.”

머리가 확 도는 거 같더라고. 너무 기막히니까 말도 더듬거리게 되더라.

“저는… TV에서… 보고… 그러니까… ”

“그러니까요. 선수 가족들 인터뷰 할 때 처음 TV에 나갔는데 그때 나한테 반한 거요? 허긴, 내가 봐도 화면발이 잘 받더라고. 그거 보고 나한테도 팬레터가 옵디다, 이래봬도 나 좋다는 아줌씨 팬들이 한둘이 아니야.”

맙소사, 나 이 아저씨한테 딱 걸린 거야?

/장덕균 개그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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