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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균의 폰꽁트] 휴대폰도 면허제를 도입하자?


 

내가 휴대폰을 소지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원래부터 손에 뭘 들고 다니는 걸 무척이나 싫어하는데다가 살면서 별로 불편함 없이 지냈기 때문에 굳이 장만해야겠다는 필연적인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휴대폰 없이도 꽤 해피하게 지냈는데 이런 나를 상대로 일하는 사람들은 무지하게 불평을 해대며 원성이 높아만 갔다.

허구한 날 나랑 부대끼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려니 하며 알아서 자구책을 찾아가며 내 행방을 찾아냈지만 어쩌다 일 관계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달랐다.

으레 ‘휴대폰 번호가 어떻게 되시지요?’ 하는 물음에 ‘저 휴대폰 없는데요.’하는 답이 돌아오면 아주 기막힌 얼굴로 나를 다시 한번 더 쳐다보고는 할말을 잃은 표정들이 가지각색이었다. 그러다가 이런 내 행태에 더 이상 못견뎌하는 사람들이 내 손에 휴대폰을 쥐어주었고 순전히 타의에 의해 이제는 그놈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 다니고 있다.

막상 휴대폰을 가지게 되니까 확실히 편리한 점은 많았다. 휴대폰이 우리의 일상사에서 얼마나 편리하고 유용한 도구인지는 모두 아니까 새삼스레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아직도 아날로그적인 인간인지는 몰라도 나는 이 휴대폰이라는 친구가 좀 성가시다.

우선 속된 말로 땡땡이가 안된다. 휴대폰이 없을 때는 일하는 게 갑자기 싫어져서 몇 시간, 혹은 하루 정도 안전하게 잠수를 탈 수 있었다. 수도 없이 나를 부를만한 어떠한 방법도 없으니 완벽하게 숨거나 불필요한 모임에서 도망을 칠 수가 있었다.

헌데 인간의 심리와 습성은 무서운 것이라 휴대폰을 가지고 다닌 다음부터는 그게 불가능하게 됐다. 휴대폰을 꺼두고 있어도 메시지는 남아있으니까 빼지도 박지도 못한다. 나를 찾는 메시지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어서 잠수를 타고 있다가도 그냥 포기하고 메시지가 부르는 대로 다시 일터로 향한다.

편리함을 얻은 대신 자유를 잃었다고 혼자 자조한다. 이제는 주위의 원성 때문에라도 꼬박꼬박 휴대폰을 챙겨들어야 하고, 일일이 메시지를 확인해서 확답을 해주어야 한다.

이왕 쓰는 거니 깜찍할 정도로 효용성이 높은 이놈을 사정없이 매섭게 다루며 요모조모 써먹어야 할 텐데 나는 아직 서투르다. 어쩌다 젊은 사람들이 그 조그만 휴대폰을 응시하며 개미 눈알만한 버튼을 눌러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걸 보면 가히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양쪽 엄지손가락이 속도감 있게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걸 보고 있으면 그 현란함에 머리가 아득해지는 느낌이다. 현란한 기교가 감탄스러우면서도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은 순간순간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만큼 기다리고 생각하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든 메마른 감성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소싯적 휴대폰 없이 연애할 때는 전화로 약속장소를 정하고 상대방을 기다린다. 카페 안이건 극장 앞이건 사랑하는 사람이 약속시간에 맞춰 나와 있기를 기대하며 가슴을 두근거린다.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시계를 들여다보며 언제 나타날까 고대하고 느닷없이 어깨를 살짝 치는 그 순간까지 상대방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재미가 사라졌다.

‘야, 너 왜 안 와?’

'지금 가고 있어. 어, 너 보인다. 야, 이쪽이야.’

미처 상대를 그리워할 필요 없이 실시간으로 자신의 활동범위를 주고받으며 그리움의 시간을 단축시키는 요즘 애들이 조금은 안됐다는 생각도 든다면 내가 너무 구시대적인 인간이라고 애들이 웃을까.

정말이지 요즘은 애나 어른이나 다 휴대폰을 들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보편적인 물품이 돼버렸다. 일하던 농부들이 새참으로 자장면을 시켜먹기 위해 논, 밭 한가운데서 허리 펴고 휴대폰을 두드리는 것도 이제는 낯선 풍경이 아니다. 그래서 이제는 전화예절뿐만이 아니라 휴대폰 예절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높다.

휴대폰은 더 이상 과시의 대상이 아니라는 걸 모두들 알 텐데 자주 그걸 잊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휴대폰을 가지고 다닐 자격이 없다고 확 뺏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 공공장소에서 마치 혼자만 그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사람처럼 큰 소리로 사사로운 개인사를 시시콜콜히 얘기하는 걸 언제까지 들어줘야 할까. 재미도 없는 남의 사생활을 계속 듣고 있어야 한다는 건 정말이지 대단한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고, 나의 인간적인 자제심을 시험받는 일이다.

너무 편리하고 유용한 인간의 이 창조물이 받아야할 찬사는 무궁무진하지만 때로는 본의 아니게 구설수에 오르기도 한다. 가끔 학생들이 선생님한테 맞았다고 그 자리에서 경찰에 신고하는 서글픈 해프닝이 세간의 화제가 될 때 괜히 덤터기를 쓰는 게 바로 휴대폰이다.

멍하니 있다가 벼락 맞는다고 인간들 편리하라고 만들어진 휴대폰이 교권추락, 사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공범으로 한데 묶일 때면 말 못하는 기계라도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할까.

어떤 이에게는 버리고 싶어도 못 버리는 애물단지이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더없이 고맙고 기특한 자식처럼 대접받기도 하는 게 휴대폰이다. 서로 잡아먹을 듯이 부부싸움을 하고 났을 때 낯간지럽게 화해를 하기도 뭐하고, 말솜씨도 없는데 글 솜씨는 더욱 없으니 사과편지도 못쓸 때, 서로의 핸드폰에 몇 줄 문자 메시지를 보내거나 하면 ‘칫’ 하면서도 자연스레 미소를 짓게 되는 것만으로도 차가운 기계는 이미 따뜻하고 다정한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이 충실한 동반자를 잃어버리게 될 때가 있다.

우리나라는 서로 나눠 쓰고 너나 없이 뭉쳐야 한다는 오랜 미덕의 관념이 너무 단단해서인지 잃어버린 휴대폰을 되찾는 일에 어려움을 종종 겪는다. 휴대폰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물건 하나 잃어버리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그 안에 저장돼있는 수많은 연락처들, 주요 메시지들, 기록들이 순식간에 날아가는 것과 같다.

언젠가 유치원생쯤 돼 보이는 꼬마 녀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걸 봤다. 한 녀석이 휴대폰을 들고 으스대고 있었다. 흔히 보는 장난감이 아닌 진짜 휴대폰이었다. ‘

앗, 이제는 유치원생까지 휴대폰을?’ 하며 주의 깊게 보게 됐다. 다른 녀석들은 부러움에 한번씩 만져보자고 성화인데 그걸 들고 있는 녀석의 말은,

“이거 우리 아빠가 주워 온 거다. 아빠가 내 장난감 하라고 했어.”

“주인 찾아줘야지?”

하도 기가 막혀서 내가 끼어들어 물었더니 녀석의 말이 걸작이었다.

“나도 그러자고 했는데 아빠가 주인 찾아 주는 거 귀찮대요. 그냥 나보고 갖고 놀라고 했어요.”

누군가는 그 순간까지 주운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릴 텐데 철부지 장난꾸러기의 고급 장난감으로 전락한걸 알면 아마 입에 거품 물고 쓰러졌을 것이다.

단지 손가락 몇 번 놀려서 임자를 찾아 주는 게 귀찮아서, 기계를 팔면 몇 푼이라도 만질 수 있으니까 하며 주운 휴대폰을 쉽게 처리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분명 그런 사람들이 우리 이웃에, 내 주변에서 아주 선량하고 평범하게 웃고 있다고 생각하면 입맛이 쓰다.

나도 언젠가 휴대폰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택시를 타고 출근을 하던 길이었다.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일을 하다가 아무래도 너무 조용한 게 뭔가 이상하다싶어 주머니를 뒤적거리니 아니나 다를까 휴대폰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 휴대폰 번호로 전화를 거니까 아침에 탔던 택시 기사분이 잘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기록들과 만만치 않은 기계값 때문에 지끈거리려던 머리의 통증이 말끔히 가실만큼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택시 기사분이니까 내가 있는 곳까지 휴대폰을 가져다주겠느냐고 물었다.

“그거야 어렵지 않은데 그냥은 좀 곤란한거 아시죠?”

당연히 기사분이 오는 거리만큼 주행요금을 드려야 한다는 기본상식은 있으니까 안도감에 호기 있게 소리쳤다.

“그럼요. 지금 계신 곳부터 메타 요금 끊고 오세요.”

“근데요, 제가 손님 내려드리고 다른 손님을 모시고 지방에 왔거든요. 지금 부산이니

까 이제부터 메타 꺾고 서울로 올라가서 연락드릴게요.”

꽈당, 그날 택시 요금 생각하면 지금도 가끔씩 애꿎은 내 휴대폰만 한번씩 무섭게 째려본다.

/장덕균 개그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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