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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병규] 게이트와 벤처


 

올해 만큼 게이트가 많았던 때도 없었던 것 같다. 이른바 ‘조폭게이트’로 더 널리 알려진 이용호 게이트가 10월 재보선을 앞두고 판을 치더니 해묵은 정현준, 진승현 게이트들이 다시 리바이벌돼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

한 두가지도 아닌 것들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터져 나온 데다가, 시도 때도 없이 리바이벌 되다 보니 보통 사람들로서는 헷갈리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니 이것이나 저것이나 볼 것도 없이 ‘더런 놈의 세상’이다.

게이트란 말은 원래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따온 말이다. 1972년 대통령 선거 때 닉슨 미 대통령이 민주당의 선거대책본부가 들어 있던 워터게이트빌딩에 도청 장치를 한 것이 문제가 돼 결국 그가 사임에 이른 사건을 총칭해 워터게이트 사건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헌정 질서를 뒤흔든 정치권력의 불법행위 사건이었다.

그것이 우리나라에서는 권력형 비리 사건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에 비춰 본다면 용례가 조금은 다른 게 아닌가도 싶다. 이른바 ‘세풍’이나 ‘총풍’ 처럼 정치권력이 권력기관을 이용해 저지른 범죄행위야 말로 워터게이트 사건에 필적할만한 사건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에는 좀처럼 게이트라는 말이 붙지 않는다. 그냥 총풍 사건이고 세풍 사건이다. 반면 이용호 게이트나 진승현 게이트 처럼 정관계 로비 사건으로 번진 사건들을 주로 게이트라고 부른다.

다른 것은 비단 이 뿐만 아니다. 워터게이트는 닉슨 미 대통령의 집요한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그 전모가 백일하에 드러나 결국 닉슨 미 대통령이 사임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의 게이트는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다. 물론 돈 먹은 사람들이 일부 드러나고 관계자들이 구속되는 수순을 밟기는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것이 이용호 게이트고, 진승현 게이트다. 이용호 게이트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번째 검찰 수사가 이뤄져 지난해 수사를 맡았던 검찰 관계자들이 ‘부적절한 수사’에 책임을 지고 다 옷을 벗고 물러났다. 그러나 이번의 검찰 수사 마저 의혹을 불식시키는 데는 실패해 결국 특별검사가 임명돼 또다시 수사가 진행중이다. 그러나 과거 옷로비 사건이나 조폐공사 파업유도사건 처럼 특별검사가 임명됐다고 얼마나 그 진상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진승현 게이트는 그 불씨가 꺼지지 않고 또 다시 살아나곤 하는 한국형 게이트의 진수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도마뱀 꼬리 잘라 내주기 식이다. 한 번도 아니고, 두번 씩이나 검찰 수사의 도마에 오를 정도면 이제는 ‘몸통’을 내보일 때도 됐지만 어지간해선 어지간해선 ‘몸통’을 내주려 하지 않는다. 내줄 것 처럼 제스처를 써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제스처인 듯 싶다. 사실 몸통은 딴 데 있는지도 모른다.

국가정보원이 연출한 희대의 살인 은폐 사건의 진상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국민들을 아연 실색케 한 수지김 사건의 주역 윤태식 씨마저 가담한 올해의 4대 게이트는 한결 같이 벤처 금융 조작 사건들이다. 변변한 기술이나 사업 기반 없이도 벤처 붐에 편승해 기업인수나 합병, 주가조작, 불법 대출 등으로 수백억 원에서 많게는 수천억 원 까지 챙겼다가 거품이 꺼지면서 ‘사고’가 난 사건들이다. 여기에는 빠짐없이 정관계 인사들이 그 조연으로 등장한다.

이들 사건들을 들여다보면 무대만 벤처와 코스닥으로 바뀌었을 뿐 과거 정경 유착시대의 재벌 행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어떤 방법으로든 일단 기반을 잡았다 하면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넓혀나간 것이나 금융권의 돈을 호주머니 돈으로 알고 제멋대로 빼다 쓴 것이나 꼭 닮은 꼴이다. 사업을 넓히고, 돈을 끌어 당기기 위해 장관계에 돈을 뿌린 것 또한 다르지 않다.

외환 위기 이후 재벌 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질 때 이들의 항변 가운데 하나는 이랬다. 어디 우리 뿐이냐. 맞는 말이다. 사실 무너지는 재벌 기업만 기업 재무구조가 엉망이었던 것은 아니다. 기업 거의 대부분이 한국적 기업 관행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총체적인 부패구조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정치권, 경제계, 관료집단, 나아가 언론과 지식인 모두가 ‘공범’이었다.

또 다시 불거지고 뒤집어지고 있는 게이트 사건들의 몸통 또한 바로 우리 정치 경제 사회의 ‘시스템’ 그 자체가 아닌가 싶다. 누군가 이들 게이트를 막후에서 조정한 실세 몸통이 있지 않겠느냐는 의구심은 의구심대로 남지만 벤처 기업가와 정치권, 관료, 그리고 ‘대박’에 목숨 건 투자자들이 한통속이 돼 연출해낸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의 일단이 게이트라는 추악한 형태로 나타난 것은 아닌가 싶은 것이다.

이른바 벤처 붐이 한창이었을 때를 생각해보자. 진승현씨는 약관 27세의 잘 나가는 청년 벤처 기업인이자 외국의 선진기법을 익히고 돌아온 기업 인수합병의 귀재였다. 머니 게임은 그 내용과 무관하게 못하는 사람이 바보였지, 지탄이나 비난의 대상일 수 없었다. 정부나 기관은 벤처 육성 자금을 줄 기업을 찾지 못해 고민이었다. 신문에 한 줄만 나도 수십억 원의 ‘눈 먼 투자’가 줄을 이었다. 누가 부탁하고 말 것도 없었다.

미쳐 돌아간 그 ‘화려한 잔치’의 거품이 빠지면서 온갖 게이트들이 줄을 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몸통은 누구이고, 무엇인가. 물론 한통속론이 자칫 이들 게이트 주역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눈먼 잔치’와는 무관하게 벤처 기업을 일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양심적인 벤처인들의 노고나 주가조작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외면하는 것이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무늬만 달라졌을 뿐 그 행태라곤 정경 유착 시대의 그것과 하나도 다를 것 없는 이들 게이트 사건들에서 우리 정치 경제 사회의 시스템, 보다 좁게는 벤처 시스템에 대한 총체적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이들 게이트들은 앞으로도 반복돼 나타나지 않을까 싶다.

각종 게이트 사건에서 정관계에서 어떤 로비가 이뤄졌으며, 누구에게 얼마나 많은 돈이 건너갔는지 밝혀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통해 확인해야 할 점은 외환 위기 이후 우리 사회가, 기업이, 그리고 정관계가 정말 얼마나 바뀌었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특히 이번 벤처 관련 4대 게이트 사건과 관련해서는 우리 사회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벤처라는 새로운 경영방식과 투자 방식의 경험과 그 공과를 살펴 볼 필요가 있겠다. 벤처라는 것이 그저 무늬만 그랬던 것인지, 그것이 남겨놓은 자산은 무엇인지, 그 인프라는 어떠해야 할지를 면밀히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어찌 됐든 수백억, 수천억 원의 값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남는 것이 온갖 의혹과 추문들 뿐이라면 너무 서글프지 않은가.

/백병규 객원 칼럼니스트 bkb21@hana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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