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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병규] hp-컴팩 합병 “잔치는 없다”


 

칼리 피오리나 휴렛패커드 회장도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다. 컴팩과의 합병을 발표할 때만 해도 미국 법무부 반독점국이나 유럽연합의 승인 여부가 골치거리였지, 이처럼 내부에 적이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것 같다. 세계 일류 여성 CEO의 자부심으로 내놓은 야심작 컴팩과의 합병이 바로 회사 창업자 후손들의 반대로 자칫 무산될 위기에 놓여 있다.

휴렛 가문이 반대 입장을 표명했을 때만 해도 비교적 여유가 있었지만 사태는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공동 창업자 가문인 휴렛과 패커드 두 가문 가운데 그 동안 입장 표명을 유보해왔던 패커드 가문 쪽 마저 최근 ‘합병 반대’ 입장을 선언해 피오리나 사장의 입지가 더욱 좁아진 것이다. 이제는 창업자 가문과 ‘한판 승부’가 불가피해졌다.

휴렛패커드와 컴팩의 공식 입장은 아직 바뀐 것이 없다. 당초 합의대로 합병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피오리나 회장 등 휴렛패커드 경영진은 설립자 진영이 반대하고 있지만 다른 투자자들은 합병을 지지할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다. 피오리나 회장은 10.4%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데이비드 앤 루실 패커드 재단이 ‘합병 반대’를 선언한 직후 “우리는 당초 계획대로 밀고 나갈 것”이라고 말하고 “또 그렇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흔들리는 컴팩…“독자 생존 논리 마련하라”

하지만 주변 상황은 무척이나 유동적이다. 상당수 애널리스트들이 합병 성사 여부를 반신반의하고 있고, 합병 상대인 컴팩 마저 주주와 고객들을 상대로 독자 생존 논리 개발에 나서는 등 ‘만약의 사태’에 준비하는 모양새다. 휴렛과 패커드 가문이 보유하고 있는 휴렛패커드 지분은 모두 18%. 이들이 모두 합병에 반대하고 있는 만큼 주총에서 합병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기관투자가들의 3분의 2를 설득시켜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다.

피오리나 회장은 미국 기업 가운데서도 가장 ‘가족적’이라는 휴렛패커드에서 왜 설립자 가문에 반기를 들었을까. 피오리나 회장은 최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합병 결정은 결코 독단적인 것도, 또 갑작스런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2년 전 휴렛패커드에 부임한 이후 줄곧 거론돼왔던 사안이며, 이사회의 총의를 모은 것이라고 반박했다.

피오리나 회장은 무엇보다 컴팩과의 합병은 휴렛패커드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그 동안 상당히 보수적인 경영 체질을 바꾸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왔지만 그런 점진적인 개선 조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결론 끝에 도달한 선택이 바로 컴팩과의 합병이었다는 것이다.

컴퓨터 분야의 대규모 합병은 시너지 효과 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다는 월스트리트의 비판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PC 시장은 앞으로 더욱 규모의 경제 원리가 힘을 발휘하는 성숙 시장이라는 것이 피오리나 회장의 진단이다. 이런 성숙 시장이야말로 동일 분야의 합병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 컴팩과는 서버 및 대형 컴퓨터, 인터넷 등 여러 분야에서 상호 보완적인 측면이 많다는 것이다. PC 분야에서는 규모의 경제로 델과 맞서고, 다른 분야에선 상호 보완적인 시너지 효과로 IBM이나 선을 제압하겠다는 구상이다.

컴팩과 합병에 비판적인 입장은 물론 정 반대의 주장이다. 컴팩과 합병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단 컴퓨터 분야의 대규모 합병은 성공하기 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점을 든다. 또 PC 사업부문이 너무 커져 자칫 수익구조가 악화될 소지가 크다는 우려이기도 하다. PC 분야가 경쟁은 치열해지는 반면 수익률은 낮아지는 사업인데 컴팩과의 합병은 PC 사업쪽을 더 키우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 양자의 시각 차이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바로 PC나 서버 등 컴퓨터 산업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점이다. 피오리나 회장을 비롯한 경영진들은 PC나 서버 시장을 비롯해 서비스 시장은 이미 가전시장 처럼 ‘성숙한 시장’이라는 판단이다. 기술력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마케팅이나 규모의 경제 같은 기술 외적 변수가 훨씬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는 산업으로 바뀌었다는 판단이다.

따라서 컴팩과의 합병은 예상되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전개되고 있는 컴퓨터 산업 환경에서 휴랫이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반면 반대론자들은 규모나 마케팅 보다는 여전히 기술력이 경쟁력을 좌우하는 가장 주요 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싶다. 컴팩과 합병은 덩치는 키울 수 있을지언정 기술력에서는 그다지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지금껏 휴렛패커드가 유지하고 있는 그나마의 경쟁력 기반 마저 무너트릴 수 있다는 우려이다. 휴렛패커드의 이사로 휴렛과 패커드 가문의 합병 반대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는 월터 휴렛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경영진 대다수가 동의한 활로 타개책”…기대점수는 ‘낙제점’

휴렛패커드와 컴팩의 합병에 대한 누구의 주장이 맞는 것인지, 옳은 것인지는 판단하기 쉽지 않다. 사실 정답이 따로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합병의 성패 여부는 결국 뚜껑을 열어 보아야 알 수 있겠지만 합병 이후에도 변수가 많은 일이다.

하지만 두 가지 측면에서 대략의 결과를 예측해 볼 수는 있겠다. 하나는 기대심리다. 합병에 대한 안팎의 반응이 어떠한가에 따라 그 결과를 예상해 볼 수 있다. 합병에 대한 반응 자체가 좋지 않은 데 그 결과가 좋게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 점에서 휴렛패커드와 컴팩의 합병은 썩 좋은 출발은 아니다. 더구나 지분 이상의 영향력을 갖고 있는 설립자 후손들이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실정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또 다른 하나는 합병 추진의 배경이다. 피오리나 사장의 말처럼 컴팩 합병 결정은 결코 회장 혼자 생각도, 혼자 결정한 것도 아니다. 컴팩과의 합병 결정에는 휴렛패커드의 프린터 사업을 지금처럼 키워낸 디차드 해크본 이사의 영향력이 컸다.

그는 휴렛팩커드가 과거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쪼가리 장비들을 파는 회사’가 아니라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 그리고 서비스 까지를 종합 제공하는 회사로 거듭나야 한다며 컴팩과의 합병을 적극 지지 추진했다고 밝히고 있다. 한마디로 컴팩과의 합병은 활로를 찾기 위해 경영진 대다수가 동의한 선택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월터 휴렛을 비롯한 설립자 후손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합병에 따른 실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표면적인 명분이지만 그 배경에는 기업 경영의 정체성 문제가 있다. 이들은 컴팩과의 합병을 신뢰와 개방성, 합의를 존중하는, 이른바 ‘HP 방식’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여기에 피오리나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에 대한 불신도 골이 깊어진 듯 싶다. 제품 이름으로 휴렛패커드라는 가문의 이름을 모두 쓰는 대신에 ‘hp’라는 로그로 압축해 쓰고 있는 것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그러면 실적이라도 좋아야 할 것 아니냐는 반문이기도 하다. 합병이라는 큰 건 하나로 주식 값이나 올려놓고 보자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혹의 시선 마저 없지 않다는 소식이기도 하다.

◆경영권 다툼으로 번진 합병 드라마

경영진과 설립자 후손간의 시각 차이는 어찌 보면 태생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이사회 일원으로 지난 6월 컴팩과의 합병 문제를 논의했던 이사회에는 참여하지 않은 채 명사들을 회원으로 두고 있는 보헤미안 클럽에서 오케스트라 연주나 즐기고 있었던 월터 휴렛이 경영진들에게는 결코 좋은 인상일리 없다. 정작 중요한 때는 자리를 비우고, 뒤늦게 이사회 결정에 반발하고 나선 것 자체가 설립자 후손의 ‘오만’으로 비춰지기 십상이다.

컴팩과의 합병을 둘러싼 휴렛패커드 경영진과 설립자 후손들간의 불화와 반목은 결국 휴렛패커드 주주들의 결정에 따라 그 향배가 결정될 것이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피오리나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들이 불리한 형국이다.

설립자 후손들의 뜻대로 컴팩과의 합병이 무산된다면 피오리나 사장을 비롯해 현 경영진들은 대거 물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령 극적 돌파구가 마련된다고 해도 한 판 좌판을 벌이기에는 흥이 너무 깨져 버린 듯한 모양새다. 피오리나 회장으로서는 그 앞길이 험난하기만 하다.

어찌 됐든 세기적인 컴퓨터 업체간 합병 드라마가 ‘소유’와 ‘경영’이라는 고전적인 쟁점으로 각색돼 연출되고 있는 것 또한 실제 드라마 못지 않은 극적 반전인 셈이다.

/백병규 객원 칼럼니스트 bkb21@hana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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