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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병규] ‘하이닉스 살리기’와 삼성의 침묵


 

말 그대로 ‘극적 반전’이다. 하이닉스와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의 제휴 발표는 단숨에 세계 경제계의 초점이 됐다. 세계 2, 3위인 D램 생산업체의 제휴가 반도체 업계에 몰고 올 파장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하이닉스 죽이기’에 앞장섰던 마이크론의 돌변이 더욱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마이크론은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일까.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다. 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의 제휴가 과연 어떻게 결론이 날 지 현재로서는 지극히 불투명하다. 마이크론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마이크론이 과연 어떤 방식의 제휴 카드를 꺼내는지를 지켜봐야 분명해질 것 같다. 그것이 공생의 선택인지, 아니면 하이닉스 죽이기의 또 따른 전략인지는 예단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이크론의 제휴 협의 자체가 이제껏 보여왔던 태도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마이크론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이닉스 ‘퇴출’을 위해 전방위 로비를 펼쳐 왔다. 미국 정부를 앞세워 더 이상의 자금 지원이 이뤄지지 않도록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한 것은 물론 인피니온 등과 연대해 WTO 제소 까지를 들먹였었다. 그런 마이크론이 돌연 태도를 바꿔 하이닉스와 제휴를 발표한 것은 ‘이변’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속내를 따져 보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D램 사업은 그 어느 사업 보다 규모의 경제 원리가 먹혀 들어가는 시장이다. 시장 점유율이 승부의 관건이 되는 사업이다. 기술 못지 않게 양산(量産)의 경쟁력이 힘을 발휘하는 산업이다. 기술집약적이면서도 값싸고 양질의 노동력이 경쟁력을 좌우한다. 그런 점에서 하이닉스는 마이크론이 탐낼 만한 제휴 대상이다.

현재 세계 D램 시장은 삼성전자가 시장 점유율 22%로 1위를 달리고 있다. 마이크론이 2위, 그리고 하이닉스와 독일의 인피니온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마이크론과 하이닉스가 손을 잡으면 시장 점유율 37%로 단숨에 삼성전자를 앞지르게 된다.

마이크론의 기술력과 하이닉스의 양산 시스템이 합쳐질 경우 예상되는 시너지 효과도 만만치 않다. 마이크론으로서는 무엇보다 세계 시장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삼성전자에 대한 견제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되고, 하이닉스로서는 기사회생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시장의 반응은 일단 호의적이다. 두 회사의 제휴 사실이 발표된 3일 하이닉스의 주가는 상한선인 15% 가까이 뛰어 올랐다. 마이크론의 주가도 1.20달러나 올랐다. 세계 반도체 업계의 반응도 나쁘지 않다. 외신들은 마이크론과 함께 ‘하이닉스 죽이기’에 연대했던 인피니온도 ‘나쁘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두 회사의 제휴는 D램 가격 하락의 결정적인 요인인 생산량을 제어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만큼 나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규모의 경쟁력이 시장 지배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D램 업계의 제휴 움직임은 무척 활발하다. 인피니온과 일본 도시바가 진작부터 제휴를 추진하고 있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세계 D램 시장을 주도했던 일본 반도체 업체들은 과거의 영화를 찾기 위해 연구개발 분야에서 너 나 없이 ‘공동 전선’을 모색하고 있다. 초기 연구 개발비를 분담함으로써 경쟁력을 학보하자는 전략이다.

일본 업체들은 이와 함께 생산 거점을 대거 중국으로 이전하고 있다. 연구 개발 분야는 일본 업체들간의 공동전선으로, 한국 업체들에게 뒤지고 있는 생산 비용 문제는 중국업체와의 제휴로 타개할 심산이다. 대만 업체들 또한 중국으로 몰려가고 있다. 5년 이내에 D램의 생산 거점은 중국이 될 것이라는 성급한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이는 D램 분야에서의 국제분업 과정의 흐름이기도 하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반도체 분야에 뛰어든 1980년대 중후반 세계 D램 시장은 일본 업체들의 수중에 있었다. 설계 기술 등 핵심 기술에서는 물론 양산 기술에서도 일본에게 한참 뒤져 있던 한국 업체들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 것은 미국의 일본 견제에 힘입은 바 크다.

당시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등 미국의 내로라 하는 D램 업체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자 미국은 이른바 슈퍼 301조라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일본은 결국 ‘미일반도체협정’이란 굴레를 받아들여야 했다. 생산량과 가격이 미일의 ‘정치적 협의’에 따라 결정됐다. 그 와중에 빈사 상태로 까지 내몰렸던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등 한국의 반도체 업체들은 도약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제 그 타깃은 한국업체로 향하고 있다. 하이닉스에 대한 채권단의 금융 지원에 정부가 개입했다면서 한국 정부에 강력하게 압력을 넣은 것은 좁게는 ‘하이닉스 죽이기’ 였지만 크게 보면 한국 D램 산업에 대한 견제였다. ‘시장의 원칙’을 내세워 하이닉스를 퇴출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D램 분야에서 한국 업체의 주도권을 제약하자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마이크론이 하이닉스와 제휴를 모색하기로 한 것은 그런 대한(對韓) 전략에 상당한 변화가 있음을 시사해준다. 하이닉스 죽이기를 통한 ‘견제의 전략’에서 하이닉스를 활용한 적극적인 ‘제압의 전략’으로 선회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풀이할 만 하다.

그렇다면 그 1차적 타깃은 누구일까. 말할 나위 없이 D램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삼성전자다. 이들 미국과 유럽의 기업이 삼성을 타깃으로 삼고 있는 점은 최근 울리히 슈마허 인피니온 CEO가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회견에서 “하이닉스 죽이기에 나선 것은 삼성전자”라고 말 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슈마허 인피니온 CEO는 이 인터뷰에서 반도체 가격의 급락과 반등의 배경으로 삼성전자를 지목했다. D램 가격의 폭락은 전반적인 수요 부진 탓이 크지만 폭락세에 드라이브를 건 것은 자신들 이상으로 하이닉스의 퇴출을 바란 삼성이라는 주장이었다. 채권단의 금융지원으로 하이닉스의 즉각적인 퇴출이 어렵게 되자 삼성으로서도 마냥 출혈을 감수할 수 없어 감산에 나선 게 D램 가격 ‘이상 반등’의 배경이라는 풀이였다.

삼성의 실제 의도가 어쨌든 하이닉스 퇴출을 통한 과잉생산 체제 조정에 중점을 뒀던 마이크론이 하이닉스 활용 쪽으로 돌아선 것은 이제 그 주요 타깃을 하이닉스에서 삼성 쪽으로 이동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고나 할까. 하이닉스와의 제휴를 통해 1위인 삼성전자의 시장 지배력을 견제하고, 나아가서는 시장 주도권을 확실히 잡겠다는 의도로 해석할 만 하다.

물론 마이크론이 하이닉스 죽이기를 완전 포기한 것인지는 여전히 미심쩍다. 제휴 협상에서 마이크론이 어떤 카드를 꺼내놓을지 좀더 지켜봐야 할 일이다. 연구 개발 부문이나 생산, 판매 부문에서의 전술적 제휴 수준에 그친다면 그것은 하이닉스 살리기 보다는 죽이기에 더 가깝다. 당장 문닫을 하이닉스가 아니라면 부분적으로나마 하이닉스의 시장 지배력을 최대한 활용하자는 쪽에 무게를 둔 것으로 풀이될 만 하다.

반면 완전 합병이든, 아니면 부분적인 지분 참여방식이든 하이닉스의 채무 부담 까지를 떠안는 방식의 제휴라면 하이닉스 전면 활용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반도체 산업의 한 축이 고스란히 외국 기업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며 ‘삼성죽이기’의 서막일 수 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삼성의 침묵이다. 그 어느 언론도 삼성의 반응을 취재하지 않아서인지 삼성의 반응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죽이기’와 ‘살리기’의 절묘한 반전을 한국 기업들이 주도할 수는 없었던 것인지 못내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백병규 객원 칼럼니스트bkb21@hana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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