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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병규] “만약 고어가 대통령이 됐다면…”


 

역사에 ‘가정(假定)’은 없다고 한다. 만약 그 때 그렇게 되지 않고, 달리 됐더라면 하는 역사적인 가정은 역사 연구에서 큰 소용이 못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쨌든 당시로서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필연이 있었던 것이고, 그 필연의 배경과 구조, 원인들을 규명해 역사가 진행돼온 그 필연의 얽히고 설킨 실타래들을 밝혀내는 것이 역사학자의 과제라고 하던가.

하지만 당대를 사는 사람들로서는 먼 과거사도 그렇지만 당대의 현실과 잇닿아 있는 바로 이웃한 이전 사건과 현상들에 대해 가정을 해보는 경우가 많다. "만약 이 때 이랬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미국의 테러 참사와 아프간 전쟁을 지켜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만약 미국 대통령에 부시가 아니라 앨 고어가 당선됐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고어가 미국의 대통령이 됐더라도 테러참사에 대한 지금과 같은 보복 전쟁은 불가피했을까. 그 이전에 고어가 대통령이 됐더라면 9·11 테러 참사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고어는 부시와 달리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좀더 적극적인 중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려 했었을까 하는 등등의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부시나 고어나 ‘힘있는 미국’이라는 대외정책의 큰 줄거리에서는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미국의 대외 정책이 한 순간에 바뀔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클린턴 전 행정부의 대외정책 큰 흐름을 이어받았을 고어가 대통령이 됐다면 중동문제에 대해서도 보다 온건하면서도 중재자 역할을 담당했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오래 전부터 기획되고 준비돼온 9·11테러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을 정도로 이슬람권의 고조된 반미 감정을 수그러뜨릴 수 있을 정도였을지는 물론 의문이다. 테러 사건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고어인들 부시와 달리 보복 공격 말고 별다른 선택이 가능했을지 상상하기 쉽지 않다.

우리 입장에서는 만약 부시 대신 고어가 미국 대통령이 됐다면 지금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북미 관계는 어떻게 됐을까 하는 점이 관심거리라면 더 관심거리일 수 있겠다. 북미관계와 남북관계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인 만큼 미국의 대북 정책은 남북관계는 물론 동북아시아 질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되돌아 보면 클린턴 전 미 대통령 임기 말년에 거의 가시권에 들어왔던 북미정상회담은 이제 생각하기 어렵게 됐다. 아직 대북 정책 담당자가 제대로 짜여지기도 전에 부시 행정부 고위 관계자들의 잇단 대북 입장 표명은 한 순간에 북미 관계는 물론 남북관계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는 고어가 미국 대통령이 됐을 때와는 아주 다른 상황인 것만은 분명하다. 역시 부질없는 역사적 가정이지만 고어가 대통령이 됐다면 북미 관계나 남북 관계는 지금 보다 훨씬 전향적으로 전개됐을 가능성은 충분히 추정해 볼 수 있다.

물론 부시 행정부의 최종적인 선택은 북한과의 대결 보다는 ‘대화’ 쪽으로 정리되고 있다. 출범 초기 한때 강경론자들이 득세했지만 행정부의 대외 정책 시스템이 정비되고 중국을 비롯한 동북 아시아 전략과 북한 문제에 대한 ‘검토 작업’이 마무리되면서 기존의 정책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서 정리되고 있는 인상이다.

하지만 APEC에 참석한 부시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겨냥해 부정적인 발언을 하는 등 북한에 대한 불신과 경계심은 여전해 북미 대화와 협상이 언제 재개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비단 대외문제 뿐만 아니다. 미 국내 문제와 경제 문제 등에서도 미국민의 선택이 달라졌을 경우 여러 분야에서 그 변화의 폭과 내용이 상당히 달라질 수 있었음을 시사하는 사례는 적지 않다. 예산문제, 세금 문제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지만 산업정책이나 각종 규제 문제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독과점 문제에 대한 접근은 선거 기간 중에도 양 진영이 뚜렷하게 대조적이었다.

정부의 규제와 간섭을 최소화하고, 가능한 한 시장의 자율 조정 기능을 중시하는 부시 행정부의 출범은 독과점 행위에 대한 클린턴 행정부 때의 완강한 저지선을 상당 부문 완화시킬 것으로 예상돼왔고, 실제 그렇게 되고 있다.

미국 독과점 규제의 두 축인 법무부와 미 연방무역위원회(FTC) 수장들은 미국의 전통적인 독과점 규제의 기본 정책에 대해서는 이론을 달지 않지만 그 방법과 개입 정도는 대폭 조정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실제 마이크로소프트 반독점 위반 사건 소송에서 미 법무부는 클린턴 행정부 때 보다는 상당히 완화된 입장이다. 미 고등법원의 판결에 따라 소송 전략의 수정이 불가피해지기는 했지만 기업 분할과 같은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해소방안’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기로 함으로써 반독점 위반 소송의 주요 쟁점 가운데 핵심 부문을 해소해 버렸다. 대신 독점적인 시장 지배력을 남용할 수 있는 기업행위에 대한 규제 쪽으로 초점을 돌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법무부가 이례적으로 세계적인 음반업체들의 온라인 음악 서비스 사업의 반독점법 위반 혐의에 대해 조사에 착수했다는 소식은 미국의 반독점 규제 시스템이 그래도 성실하게 작동되고 있다는 믿음을 줄 만 하다.

냅스터의 온라인 음악 공유 서비스를 저작권 위반 혐의로 걸어 족쇄를 채운 이들 세계적인 대형 음반 사업자들이 독자적인 컨소시엄을 구성해 온라인 음악 서비스에 나서려는 것이 독점적인 시장 지배행위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조사한다는 것이다.

관련 부처들의 재벌 규제 완화 정책에 제동을 거는 공정거래위원회에 대해 ‘월권 시비’나 제기하는 우리 처지에 비춰 볼 때 미국의 법무부는 그래도 국민과 시장에 성실한 파수꾼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적 가정은 무모할 뿐더러 부질없는 일이기 십상이다. 그래도 역사적 가정을 해보게 되는 것은 앞으로의 선택을 위해서는 쓸모 있는 일일 수 있다. 이미 지나간 과거 일이야 어떻게 할 것인가. 하지만 앞으로의 선택이 후회 없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부단히 지난 일들에 대해 역사적 가정법을 대입시켜 보게 된다.

이미 정치판은 대선 레이스에 들어선 것 같다. 이전 투구의 싸움판은 여야 가릴 것 없이 정치적 혐오와 불신만 증폭시키고 있다. 그래도 선택의 시기는 정해져 있고, 그 시기는 여지없이 우리 앞에 닥칠 것이다. 꼴 보기도 싫은 정치판이기는 하지만 과연 우리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따져보는 작업을 게을리 할 수 없는 이유이다.

무엇보다 언론들이 그 선택이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인지 하나 하나 따져 줘야 할 터인데, 그것을 기대하기가 무망해 보이니 이 또한 갑갑한 노릇이다.

/백병규 미디어오늘 전 편집국장, inews24 객원기자 bkb21@hana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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