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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병규] 미국의 패권과 상상력의 빈곤


 

미국이 마침내 전쟁 개시 ‘단추’를 눌렀다. 인도양에 포진해 있던 미 항모 엔터프라이즈호를 비롯한 미국의 불침 항모군단에서는 7일 야심한 밤에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 50기의 발사 단추를 눌렀다. 미국의 심장부에서 '거대한 불길'이 치솟은 지 26일 만이다.

이 전쟁이 어떻게 매듭될 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21세기 세계사의 흐름에 큰 변화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평화와 공존의 시대가 펼쳐질 것이라는 인류의 희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번 전쟁은 인류의 상상력을 뛰어넘은 것이다.

이번 전쟁을 촉발한 계기가 된 테러 사건 자체가 그렇다. 세계 초대강국 미국의 심장부에 민간 항공기들이 내리 꽂힐 줄 그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미국 테러사건이 발발할 때 필자는 여의도에서 증권 관계자들과 ‘한 잔’ 하고 있었다. 테러 사건 일보를 접한 집에서 미국 뉴욕 빌딩에 경비행기가 충돌했다는 전화를 받고도 사태의 심각성을 자각하지 못했다. 경비행기가 뉴욕 시가지 빌딩에 충돌했다는 데 다음날 주가에 영향을 줄까 하는 심심한 농담풀이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자리에 동석했던 애널리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주가에야 큰 영향이 있겠냐. 하지만 그것이 이스라엘의 강경 정책에 반발한 이슬람의 자살 테러라면 불안 심리를 자극해 주가에도 영향을 미칠지 모르겠다”고. 불행하게도 그 예측은 적중했다. 얼마 되지 않아 집에서 다시 걸려온 전화는 “전쟁이라도 난 것 같다”는 것이었다.

TV에서 그날 밤 늦도록 틀어주는 여객기 충돌 장면은 몇 번을 보아도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테러를 소재로 한 그 어떤 영화 보다도 ‘실감’ 있고, ‘충격적’이었다. 이것이 현실인지, 영화 속의 한 장면인지 잘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미국 뉴욕타임스의 중동 전문가 톰 프리드먼은 텔레비전 대담프로에서 이번 테러 사건을 가리켜 “미국과 미국민들의 상상력의 엄청난 실패”(한겨레신문 10월 9일자 윤국한 특파원 리포트)라고 지적했다고 한다. 세계의 모든 정보를 손바닥 뒤집어 보듯 꿰고 있는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테러사건을 사전에 감지하지 못한 데 대한 책임론이 거론되자 한 말이다. 상상을 초월한 테러행위를 유발한 미국에 대한 ‘적대감’과 ‘증오심’이 이처럼 크리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상상력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큰 자산이다. 정치 경제는 물론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상상력은 도모하는 일의 성패를 좌우하고, 미래를 결정짓는다. 그 상상력이 바닥을 보이고, 구태에 빠져 있을 때 역사는 인류를 조롱하고, 인류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인류 역사의 흐름을 보더라도 그렇다. 역사는 가끔 당대인들의 상상력을 뛰어넘어 진행돼 왔다. 사라예보의 총성 한 발이 1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되리라고는 당대인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독일의 나치세력이 전쟁을 예비하고 있던 때에도 미국은 나치정권과의 ‘화해’와 ‘공존’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장삿속에 빠져 있던 미국 기업들은 나치 정권의 전쟁 준비를 한편에서 도와주고 있었다.

이번 전쟁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이 어떤 결과로 매듭될지는 속단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과 같은 ‘미국의 상상력’으로서는 그들의 상상력을 뛰어넘은 테러를 뿌리 뽑기는 힘들 것이라는 점이다. 미국에 대한 이슬람권의 증오심과 적대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자각하지 않는 한 아프간 공습 직후 빈 라덴이 발표한 성명처럼 “미국은 평화를 누릴 수 없을 것”이다.

비단 이슬람 문화권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세계화로 일컬어지는 미국의 패권주의는 세계 도처에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세계 유일의 초대강국으로서 미국이 미국식 기준과 질서를 세계에 강요하는 한 그것은 불화를 빚을 수밖에 없다. 미국 편 아니면 테러 편이라는 미국의 오만하기 짝이 없는 편가르기는 미국의 일방주의와 패권주의가 얼마나 위태로울 수 있을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반세계화 운동은 이제 시민 사회 단체 수준을 벗어나고 있다. 세계화 진영 내부에서 조차 자성과 반론들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이코노미스나 파이낸셜 타임즈 같은 자본주의의 파수꾼 언론들 마저 세계화를 논쟁의 소재로 삼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번 전쟁은 미국의 상상력 뿐 아니라 인류의 상상력이 시험대에 선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국의 일방적인 패권에 대한 도전을 무력으로 진압할 수 있다는 미국과 세계화 진영의 대응이나, ‘중립지대’란 없다는 미국의 강요에 그 어느 한 편에 설 수밖에 없는 이슬람 국가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선택은 더욱 그렇다.

미국의 ‘빈곤한 상상력’에 기댄 이번 전쟁에서 과연 승자라는 게 있을지 조차 의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미국의 그 빈곤한 상상력에 휩쓸려 들어 가고 있다. 우리 또한 예외는 아니다. 동맹국 미국의 주문을 외면할 수 없는 ‘힘없는 정부’는 걸프전 때와 같은 지원을 주문처럼 외우고 있다. 야당 총재마저 뒤질세라 미국의 편에 서야 할 것임을 강권하고 있다.

. 20세기 후반, 아직 냉전 체제가 와해되기 전 미국과 구 소련은 베트남과 아프간에서 패배했다. ‘제국의 무덤’이라는 아프간에서 미국이 탈레반 정권을 전복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프간과 이슬람의 ‘반미정신’ 까지를 압살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미국의 패권과 경제력이 21세기에도 20세기와 마찬가지로 지속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 다만 그 향배의 단초는 이번 전쟁이 갈무리되면서 찾아질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전쟁은 20세기의 유산인 미국의 패권이 시험대에 선 것이자 인류의 상상력의 시험 무대이기도 하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세계의 변화를 제대로 읽어내는 상상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때다.

/백병규 미디어오늘 전 편집국장, inews24 객원기자 bkb21@hana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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