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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병규] 테러와의 전쟁, 그 전선 없는 전쟁


 

지난 9월 25일 뉴욕타임스에는 이번 미국 항공기 테러사건 수사 속보가 실렸다. 익명의 고위 수사 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이 기사의 내용을 한마디로 간추리면 “아직까지 미국내에서는 이번 테러사건과 관련한 배후조직이나 배후 인물, 관련 인물들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테러리스트들과 접촉이 있거나 관련이 있다 싶은 수 천명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수 백 명을 검거하거나 조사했지만 이들 가운데 이번 테러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단서는 아직 포착하지 못했다는 것이 이 고위 수사관계자의 말이다.

용의선상에 오른 일부 인물 가운데 몇 명이 테러리스트들과 접촉하고 ‘도움’을 준 것이 확인되기는 했지만 이들 역시 테러 계획은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오히려 단서는 독일 쪽에서 잡힐 공산이 더 크다는 이야기도 흘러 나왔다.

뉴욕타임스는 “수사 결과를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이란 전제 하에 조심스럽게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지금까지의 수사 결과가 그렇다면 부시 대통령이 테러 사건의 배후로 사실상 오스마 빈 라덴을 지목하고,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을 때 미국 내에서는 이를 입증할 만한 그 어떤 명확한 증거도 확보하지 못했던 것 아닌가?

이번 테러사건에 대한 미국 수사당국의 수사가 미국 내에만 국한 됐을 리 없다. 국제 테러조직에 대한 수사인 만큼 외국 수사기관과 긴밀한 공조 하에 수사가 이뤄지고 있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을 선언한 서방 동맹국들도 미국 쪽에 빈 라덴과 그를 비호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쟁 개시에 앞서 최소한 ‘명백한 증거’를 제시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미국이 과연 어느 정도 확실한 증거를 포착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미국은 수사 상황과 전쟁 준비에 대해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고 있다. 자료들이 공개될 경우 수사에 차질을 빚는 것은 물론 수사에 협조한 정보원이 노출돼 그들의 신변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이유다.

전쟁 준비 상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전쟁 준비 상황이 알려질 경우 자칫 공격 목표인 빈 라덴과 테러 조직들에게 ‘방어’하거나 ‘도피’할 기회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작전에 차질을 빚을 수 있으며 작전에 투입되는 군인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는 없다는 논리다.

미국이 이번 테러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테러조직에 대해 어떤 증거를 제시할 수 있을지 주목되지만 증거 제시와는 무관하게 전쟁은 선포됐고, 작전은 이미 진행 중이다.

부시 미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면전을 선언했다.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테러조직의 특성상 테러와의 전면전은 ‘전선 없는 전쟁’이 될 공산이 높다. 지금까지 국가 단위, 혹은 지역 단위의 분쟁이나 전쟁과는 전혀 다른 전쟁이 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실제 미국의 전쟁은 이미 다방면에서 전방위적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세계 각국은 무조건 ‘미국 편’에 설 것을 강요받고 있다.

비단 국가 차원에서만 강요되고 있는 선택이 아니다. 미국은 이번 테러사건과 연관된 조직의 자금줄을 차단하기 위해 전세계 금융기관이 이들 조직과 관련된 모든 금융계좌를 동결할 것을 ‘명령’했다.

만약 그렇지 않은 금융기관이 있다면 이들은 미국 내에서 사업을 포기해야 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테러와의 전쟁의 화살이 엉뚱하게 세계 금융권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고객의 신분 보장을 철칙으로 삼고 있는 금융기관들로서는 사법적 절차도 치지 않은 이런 주문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세계 금융권 뿐만 아니다. 세계 통신서비스 사업자들도 수사당국의 주요 협조 요청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 수사 당국은 이미 무차별적인 통신 검열 및 조회에 나서고 있다는 소식이다. 유무선 통신사업자는 물론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자들에게 통신 및 접속 기록에 대한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법원의 영장을 제시하는 ‘합법적 절차’를 거친 것도 있지만 법원의 결정 없이 수사 당국의 ‘협조 요청’으로 이뤄지는 것이 태반이라는 게 이들 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영국도 향후 1개월 동안 모든 통신 기록을 보존해놓을 것을 통신사업자들에게 지시했다. 미국 수사당국의 요청이 있을 때를 대비한 조치이다. 이 같은 움직임은 비단 영국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유럽의 상당수 국가들도 내부적으로 이러한 조치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 불똥은 시민사회 쪽으로도 튀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민자들에 대한 구류 기간 연장 조치가 이미 취해졌으며, 수사당국의 검열 및 도청권한 확대가 추진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보다 엄격한 방식의 신분증 제도를 도입하려 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미국에서는 또 통신 및 컴퓨터, 인터넷에 대한 수사기관의 검열권한도 대폭 확대하는 법안이 제출됐다. 개인의 세금 자료는 물론 금융거래등에 대한 조사 열람권 확대도 추진되고 있다. DNA 샘플 조사 등을 폭 넓게 허용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테러리스트들이 주요 통신 수단으로 인터넷을 사용했을 것이라는 추정 아래 전자우편 등에 사용됐던 암호화 기술에 대한 규제도 논의되고 있다. 클리퍼칩(Clipper Chip)이라고 하는, 클린턴 행정부 때 논란이 됐던 ‘뒷문(back door) 허용문제’가 다시 거론되고 있다. 수사당국이 모든 암호화 파일이나 통신에 접근할 수 있도록 ‘뒷문’을 설치토록 강제한다는 내용이다.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시민 사회단체들은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한목소리로 정부와 의회의 이 같은 움직임들이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규제의 ‘위태로운 균형’을 무너트릴 수 있다며 신중한 대응을 촉구하고 나섰다.

테러사건의 충격이 큰 것만은 분명하지만 정부와 의회의 과민 반응이 수 백년에 걸쳐 실현시켜온 시민권을 위축시키고, 개인의 자유를 크게 후퇴시킬 수 있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규제 강화 움직임은 비단 시민사회의 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금융과 통신, 인터넷에 대한 규제 강화와 검열은 사실상 미국이 앞장서 추구해왔던 모든 비즈니스와 서비스의 자유화와 세계화에 제동을 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수천명의 사상자를 낸 비극적인 테러사건의 근원적 배경에 대한 반성적 고찰 없이 미국민들의 분노에 편승한 응징 일변도의 ‘전쟁’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빚을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그 영향이 단지 빈 라덴과 아프가니스탄의 운명에만 국한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미 세계 경제가 그 후푹풍에 휩싸여 휘청거리고 있고, 금융 및 통신, 인터넷을 비롯해 모든 비즈니스의 틀거리도 흔들리고 있다.

그 후푹풍에서 우리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조만간 들이닥칠 이 전쟁의 광풍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예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단지 이번 전쟁에 대한 국가 차원에서의 대응만이 아니다. ‘전선없는 전쟁’은 비즈니스 영역은 물론 시민사회로 까지 또 다른 모습으로 그 전선이 확장되고 있다.

/백병규 미디어오늘 전 편집국장, inews24 객원기자 bkb21@hana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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