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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석의 밴쿠버 리포트] 실리콘밸리의 어제와 오늘


 

인터넷 붐, 닷컴 붐이 한창이던 지난 90년대 후반 미국 실리콘밸리만큼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았던 지역도 드물다. ‘하이테크 메카’라는 별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실리콘밸리는 첨단 기술 개발 및 관련 비즈니스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특히 닷컴 붐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 세계로 번져나갈 때 실리콘밸리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젊은이들이 가장 선망하는 일터였고 실제로 이곳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백만장자, 억만장자가 배출되기도 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부와 명예까지 안겨주던 ‘약속의 땅’ 실리콘밸리가 지난 2001년 초 시작된 닷컴 붕괴 이후 쇠락을 거듭, 마치 잔치가 끝난 파티장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 보는 이로 하여금 격세지감을 느끼게 만들고 있다. 불과 2년 전만해도 화려함과 풍족함, 희망과 생기가 가득하던 실리콘밸리 어디에서도 이제는 그런 밝은 모습을 찾아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의 실리콘밸리가 지난 날과 확연히 달라진 모습은 여기저기서 눈에 띤다. 우선 기업들의 씀씀이 척도가 되는 파티가 닷컴 붐 시절에는 시도 때도 없이 열렸으나 그런 모습이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당시 실리콘밸리에서는 일주일에 평균 서너건의 닷컴 개업파티가 열렸다. 개업파티 외에 각종 기념 파티까지 감안하면 하루 저녁에도 몇 건 씩의 파티가 실리콘밸리 밤을 즐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각종 파티마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무료로 음식과 드링크를 즐기고 돌아갈 때는 푸짐한 선물을 받아가곤 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한 홍보회사의 분석에 의하면 당시 닷컴 기업들이 파티를 열면 적게는 15만 달러에서 많게는 25만 달러씩의 비용을 아낌없이 써댔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지난해 연초 닷컴 붕괴가 시작되면서 개업파티는 핑크 슬립, 즉 종업원 해고파티로 변해버렸다. 개업을 축하하고 신기술 개발을 축하하는 파티가 아니라 실직하는 사람들이 재취업을 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서로를 위로하기 위한 우울한 파티로 달라진 것이다. 실리콘밸리에서는 당시 닷컴 경제를 다루던 월간지 ‘The Industry Standard’가 매월 개최하던 옥상 파티를 취소한 것을 계기로 공식적인 파티는 막을 내린 것으로 보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쇠락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현상은 종전에 하이웨이를 따라 즐비하던 닷컴 기업들의 광고 간판이 눈을 씻고 보아도 찾기 힘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실리콘밸리에는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부터 남쪽 방향으로 실리콘밸리 중심부를 남북으로 잇는 ‘루트 원오원(101)’이라 불리는 하이웨이가 있다.

닷컴 붐 시절 이곳을 지나치다 보면 닷컴 탄생을 알리는 화려한 간판들이 수도 없이 눈에 들어왔다. 그 간판들은 당시 닷컴에 수백만 달러를 쏟아 붓던 벤처캐피털회사들이 마케팅 차원에서 뿐 아니라 도로상의 아트갤러리라는 의미를 부여하면서 막대한 돈을 들여 내 걸었던 간판들이다.

상업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추구하던 이들 간판 내걸기 경쟁은 이곳 하이웨이를 지나가던 많은 운전자들이 자칫 방심하다 교통 사고를 내기 십상일 정도로 눈요기거리가 되기도 했다. 당시 가장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자아냈던 간판은 가든닷컴(Garden.com) 간판으로서 실제 살아있는 식물에 특수 관개시스템을 이용하여 물을 줄 수 있게 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곳에서 닷컴 광고판을 구경하기가 어렵다. ‘원오원’ 하이웨이 양쪽에 그 많던 닷컴 간판은 찾아보기 어렵고 자동차 메이커나 레스토랑 호텔 등이 내건 간판이 간혹 보일 뿐이다. ‘야후’ 같은 몇 개 닷컴기업 광고판이 겨우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고 심지어 하이테크 대기업들 광고 간판도 종전처럼 화려하지가 않다. 단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출연하는 영화광고가 예나 지금이나 화려함을 잃지 않고 있는 정도다.

실리콘밸리는 이처럼 외형적으로만 그 화려함이 과거 속으로 묻혀버린 게 아니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불과 2년 전의 일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우선 과거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고실업률에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 10월 말 통계에 의하면 실리콘밸리의 실업률은 7.9%로서 지난 1983년 이래 최고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닷컴 붕괴 직전인 2000년 12월에는 실업률이 1.3%에 불과했다. 당시 하이테크 기업에서 연봉 8만 달러 정도를 받으며 어깨에 힘을 주고 지대던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일자리를 찾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있으며 심지어 레스토랑 웨이터로 일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운영되는 한 리쿠르팅 웹사이트의 경우 닷컴 붐 때는 하루 300~400 건의 구인 광고가 소개됐으나 지금은 겨우 10여건 정도가 소개되고 있을 정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과거에는 구직자가 목에 힘을 주면서 연봉을 많이 주는 회사를 골라 일자리를 구했으나 이제는 일자리가 하나 나오면 보통 20대 1정도의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만 취업이 가능하다.

실리콘밸리 거주자들의 의식주 현상에서도 이곳의 침체된 경기를 실감하게 된다. 우선 인기있는 레스토랑을 가더라도 지금은 예약이 필요치 않다. 과거와 전혀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과거 성공한 20대 젊은이의 상징이었던 포르쉐 자동차 리스붐도 이젠 과거지사로 묻혀버렸다. 지금은 그때 리스했던 포르쉐를 렌터카 회사에 반납하는 현상만 두드러지고 있을 뿐이다.

또 닷컴 붐 시절 렌트비가 천정부지로 올라 도쿄 등지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임대료를 물어야 했던 아파트 임대료도 폭락했다. 샌프란시스코의 경우 지난 3분기 아파트 평균 임대료가 1천632 달러로 집계됐는데 이는 7분기 연속 임대료가 하락한 것이다. 대부분의 아파트 주인들이 그나마 세입자를 붙들어 두기 위해 지속적으로 임대료를 인하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암울해진 실리콘밸리에서 한가지 밝은 면을 찾는다면 그동안 닷컴 붕괴과정에서 살아남은 개인이나 기업들이 과거보다 훨씬 나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는 사실이다. 즉 높은 임대료, 앉을 틈이 없던 레스토랑, 시도 때도 없이 막히던 도로 등 최악의 상태를 보이면 생활 환경이 크게 개선된 것이다. 경쟁자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느낄 수 있는 흡족함이라고 할까.

실제로 ‘루트 원오원’의 경우 아직도 샌프란시스코에서 산 호세까지 약 80km 거리를 통근하려면 러시아워에는 거의 두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교통량은 예전에 비해 10~15% 감소됐다. 또 사무실 임대료가 대폭 내려가 비좁은 공간에서 높은 임대료를 내고 건물주 눈치를 보면서 고생하던 기업들이 그때 보다 훨씬 낮은 임대료를 내면서도 넓직한 공간에서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 운이 좋으면 많은 돈을 투자하여 멋지게 꾸며놓은 사무실을 그대로 임대하여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순전히 거액을 사무실 꾸미는데 투자해 놓고 망한 기업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변화된 모습들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변화는 무엇보다 실리콘밸리 기업과 일반 사람들의 의식의 변화라 할 수 있다. 일단 쓰고 보자는 식의 생활패턴이 사라지고 검소한 모습으로 변화했다. 이는 어쩌면 지극히 잘못됐던 기업 및 개인들의 생활과 경영 방식이 정상으로 되돌아 왔음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닷컴 붕괴에서 얻은 가장 갚진 교훈도 바로 그것이 아닌가 싶다.

/주호석 리더스컨설팅그룹 북미담당 고문 hsju@canad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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