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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석의 밴쿠버리포트] CEO들의 ‘권력욕’


 

HP-컴팩(Compaq Computer Corp.) 합병 과정에서 칼리 피오리나 HP(Hewlett-Packard Inc.)회장과 함께 합병의 공동주연을 맡았던 마이클 카펠라스(Michael Capellas)는 얼마 전 HP/컴팩의 사장자리를 떠나면서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한번 CEO자리에 앉아본 사람에게는 CEO로서의 피가 흐른다’고 하는 멘트다. 카펠라스의 ‘CEO본질론’ 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말은 CEO로서 달콤한 맛을 한번 보게 되면 그 자리를 떠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는 마치 ‘정치판에서 권력의 맛을 본 사람은 절대로 권력욕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정치판의 고전과 같은 표현과 흡사하다.

카펠라스의 이 말은 얼마 전 그가 HP/Compaq을 그만두고 회계부정 스캔들로 인해 엉망이 된 미국 통신회사 월드컴(WorldCom Inc.)의 CEO 자리로 옮겨가는 것이 거의 확정적이라고 그 자신이 밝히면서 한 말이다. 이는 그가 HP/컴팩을 떠나게 된 배경을 그 나름대로 간략하게 설명한 것으로 해석된다.

컴팩 사장(CEO)으로서 라이벌 관계였던 HP와의 합병을 주도했던 카펠라스는 양사간 합병이 마무리되자 합병회사의 2인자 자리로 신분이 낮아지게 됐다. 결국 카펠라스는 과거 최대 라이벌회사의 최고 경영자였던 피오리나 회장 밑에서 사장 자리를 지켜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안정된 회사의 2인자보다는 차라리 파산직전의 궁지에 몰린 기업일 망정 1인자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월드컴의 CEO를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이 월드컴 CEO로 거론되면서 카펠라스의 입지가 애매하게 되긴 했다. 하지만 잘 나가는 기업의 2인자 자리보다는 쓰러져가는 기업의 1인자 자리를 선택한 것은 CEO 자리에 대한 그의 강렬한 욕망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HP와 컴팩 합병이 거의 마무리돼 가던 지난 3월 카펠라스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HP사장 자리는 ‘대단한 자리(Great Job)’다. CEO자리만이 내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다”라고 공언을 했었다.

이런 배경에서 그가 한 이 말은 특히 사상 유례없는 최악의 침체기를 겪고 있는 미국 하이테크 사업분야의 수많은 CEO들이 부침을 거듭하고 있는 가운데 나온 말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특히 근래 들어 미국 하이테크 업계의 많은 경영자들의 행보가 카펠라스의 ‘CEO 본질론’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 같은 모습이어서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한 예가 미국의 거대 통신그룹 AT&T의 케이블 사업 부문인 AT&T브로드밴드에서 그동안 1, 2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윌리엄 슐레이어와 론 쿠퍼의 AT&T와의 결별이다. 이들 두 사람은 AT&T브로드밴드를 그동안 경쟁관계였던 컴캐스트(Comcast Corp.)가 인수하고 나면 바로 AT&T를 떠날 예정이다. 자신들이 속해 있던 회사가 경쟁사로 넘어가면 어짜피 기존의 최고경영자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공교롭게 이들 두 사람도 월드컴과 비슷하게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기업의 CEO와 COO자리로 옮겨갈 예정이다. 즉 미국의 케이블TV 및 통신그룹으로서 역시 회계부정 사건에 휘말려 회사 유사이래 최악의 경영난을 겪고 있는 아델피아 커뮤니케이션즈(Adelphia Communications Corp.)가 이들의 영입을 추진 중이며 수 주내로 결론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아델피아는 분식회계와 최고 경영자의 부당 이득 취득 행위 등으로 인해 기업 이미지가 완전히 실추된 기업이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악덕기업의 대명사처럼 치부하고 있을 정도다. 그런데도 이들은 그동안 쌓아온 명성에 걸맞지 않게 진흙탕에 빠져있는 아델피아의 최고 경영자 자리로의 전직을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기업의 경영조직에 있어서 ‘넘버원’ 자리에 대한 미련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최고 경영자의 자리를 지키다가 더 이상 자신이 회사의 경영에 관한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면 그 자리를 떠나고자 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위기에 놓여있는 기업의 최고 경영자가 될 경우 자신이 의사결정권을 갖게 되는 것은 물론 그 의사결정이 제대로 먹혀 들어갈 경우 해당 기업은 물론 주주 그리고 그들 자신에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잠재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또 위기에 처한 기업의 사령탑이 되는 경우 대개는 한정된 기간동안 최고 경영자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명예나 돈을 잃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기업을 생존만 시켜나가도 그에 대한 보상이 뒤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위기관리에 크게 성공하는 경우 그 CEO는 엄청난 돈과 명예를 동시에 취할 수 있는 것이 CEO들의 세계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IBM에서 명예롭게 CEO자리를 떠나게 된 루 거스너(Lou Gerstner)의 경우다. 그는 지난 1993년 RJR Nabisco Holdings Corp.의 회장 자리를 그만두고 IBM의 최고경영자가 됐다. 당시 IBM은 경영상태가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거스너는 취임 이후 지금까지 탁월한 경영수완을 발휘하여 IBM의 옛 명성을 되찾아 준 것은 물론 자신도 명예와 부를 모두 거머쥔 상태에서 최근 CEO자리 은퇴를 발표했다.

캐나다에도 이와 아주 유사한 사례가 하나 있다. 몇 년 전 약관의 나이에 에어캐나다의 최고 경영자가 되어 위기에 놓여있던 이 회사를 정상으로 회복시킨 로버트 밀턴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세계적으로 항공사들이 경영난을 겪고 있던 2-3년 전에 캐나다 내 경쟁사였던 캐나다 에어라인을 인수하면서 에어캐나다를 사실상 캐나다 항공업계의 독점회사로서 확고한 입지를 구축한 바 있다.

미국의 또 다른 회계부정 관련 통신기업인 타이코(Tyco International Ltd.)의 에드워드 브린(Edward Breen) 사장도 비슷한 케이스다. 그는 지난 여름 타이코가 회계 부정사건으로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 때 모토로라의 고위직을 버리고 타이코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브린은 당시 모토로라에서 잘 나가는 고위 임원으로서 최고 경영자 물망에 오르는 전도가 양양한 인물이었다.

그러면 무엇이 그렇게 잘 나가던 브린으로 하여금 모토로라를 떠나게 만들었을까. 튼튼한 회사의 장래가 촉망받는 인물이었던 그가 상처 투성이의 타이코 CEO자리로 옮기게 된 유일한 이유는 역시 ‘넘버원’ 자리에 대한 욕망 때문이었다. 즉 모토로라 창업자의 손자인 크리스토퍼 갈빈이 CEO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갈빈이 CEO자리를 지키는 한 그는 1인자의 자리에 오르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그리고 타이코의 CEO자리는 비록 앞길이 험난하긴 하지만 1인자가 되고 싶은 그를 고민하게 만드는 그런 라이벌이 존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CEO들의 권력욕이 어떤 것인지를 잘 나타내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주호석 리더스컨설팅그룹 북미담당 고문 hsju@canad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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